최초입력 2025.06.05 13:04:36
(41) 테오도르 제리코의 근친상간
눈을 마주쳤을 때, 온몸에 전기가 흐름을 느꼈다. 저릿저릿한 느낌이 수 분간 이어졌을 정도였다.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나’ 여러 번 반문해봐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는 확신했다. 붙 같은 떨림, 운명적 사랑이 분명하다고. 사내가 운명이라고 확신했지만, 그녀 옆에는 어엿한 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외삼촌’이라고 부르는 남자였다. 그렇다. 운명적 사랑을 느낀 여인은 그의 외숙모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금단의 열매를 기어이 따먹고 말았다.
‘금기’를 넘나든 사랑에 빠져든 남자의 이름은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호의 뗏목’이라는 위대한 작품으로 예술사에 적잖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전대미문의 해양 사고를 그린 ‘메두사호의 뗏목’에는 ‘근친상간’으로 얼룩진 가정사가 파편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다.
6살 연상 외숙모…첫눈에 반하다
물심양면 지원해준 삼촌을 ‘배반’
제리코는 노르망디 주도 루앙에서 태어난 명문가 자제였다. 끼니 걱정, 돈 걱정 없이 유복하게 살던 티 없이 맑은 어린아이. 어딜 가나 ‘도련님’ 소리를 듣고 다니는 타고난 금수저였다. 1796년 그가 다섯 살 되던 해 아버지 조르주는 담배 사업을 시작하고자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제리코에게는 천운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위대한 화가가 즐비했던 파리에서도 제리코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피사체는 ‘말’이었다. 귀족 자제로서 어렸을 때부터 승마를 즐긴 덕분이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말은 무엇보다 제리코 내면에 응축된 에너지를 표현하는 데 탁월한 객체. 제리코와 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1808년 어머니가 죽었다. 홀로 남은 아버지와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어머니는 거친 두 사람 사이 ‘방파제’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그림을 그리는 걸 썩 못마땅해했다. 어머니의 추억 조각을 찾기 위해, 또 아버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제리코는 외삼촌인 카리엘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건 어머니의 따스함이 아니었다. 강렬한 사랑의 열망과 몰려오는 성적 충동이었다. 외삼촌 카리엘이 아내라고 소개한 인물 알렉상드린을 본 뒤였다. 카리엘보다 27살이나 어린 신부. 제리코와 비교해도 6살 연상에 불과했다. 순전히 돈 때문에, 또 가족 때문에 마지못해 결혼해야 했던 알렉상드린 역시 미남 제리코가 싫지 않았다.
1814년 아버지 조르주마저 죽었다. 제리코는 궂은일 한번 해본 적 없는 도련님의 전형. 외삼촌 카리엘은 그를 물심양면 지원해줬다. 카리엘은 조카의 그림을 향한 열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외삼촌 카리엘은 제리코에게 이탈리아 로마로의 여행을 권했다. 르네상스 거장들 숨결이 아직 남아 있는 곳, 그래서 모든 화가가 꿈꾸던 곳이었다. 제리코는 외삼촌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림’을 더 배우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에는 외숙모와 금기된 사랑을 하게 될까 조마조마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랑으로부터의 도피였던 셈.
피렌체·로마·나폴리를 여행한 제리코는 미켈란젤로와 티치아노의 작품을 보며 전율했다. 어렸을 때처럼 그들의 작품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았다. 풍부한 감정을 미학적으로 그림에 반영하고 ‘낭만주의’식으로 재해석했다. 제리코는 화가로서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있었다.
아이 출산 후 외숙모는 수녀원에 유폐
근친상간 자책감과 혼란 ‘명작’으로 승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제리코. 그의 눈엔 파리의 화려함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몽땅 사로잡은 딱 한 사람은 역시나, 또 여전히 외숙모인 알렉상드린이었다. 2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그녀는 아직도 옥처럼 빛나고 있었다. 결국 제리코는 선을 넘고 말았다. ‘근친상간’이 벌어졌다. 1817년의 일이다.
이듬해 8월, 알렉상드린이 아이를 낳았다. 남편 카리엘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내연남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지지해준 조카 제리코였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엄마도, 아빠도 알지 못한 채 멀고 먼 친척 집으로 보내졌다. 알렉상드린은 수녀원에 유폐됐다. 당대 프랑스에서 ‘근친상간’ 스캔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명문 가문에서는 더욱더. 치욕적인 추문은 어떻게든 가려져야 했고, 제리코는 소리 소문 없이 집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을 잃는다는 건, 망망대해에서 뗏목에 의지해 삶을 건사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제리코는 마치 정신병자처럼 방 안에 처박혀 그림만 미친 듯이 그려댔다. 근친상간을 했다는 죄책감, 발각됐을 때의 수치심,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알렉상드린과 태어난 아이. 혼란과 상실감 속에서 그는 자신을 학대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사건이 ‘메두사호의 뗏목’이다.
1816년 7월 발생한 해상 사고. 모래톱에 부딪혀 가까스로 뗏목을 만들어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 13일의 표류로 147명 승객 중 살아남은 사람은 고작 15명이었다. 인류가 추구해온 생명 존중의 가치도, 귀족이 추구해야 할 우아한 모습도, 죽음의 공포 앞에선 무력했다.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바다에 빠뜨리고, 먹을 것이 떨어지자 시신을 먹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제리코는 이 사건을 화폭으로 옮기겠다고 결심했다. 존재의 끝자락에서 미쳐버린 생존자들에게서, 광인이 돼버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살기 위해 도덕을 버린 생존자들. 성적 욕구로 무참히 윤리를 짓밟아버린 제리코는 메두사호와 연결되고 있었다.
그는 몇 날 며칠에 걸쳐 그림에만 열중했다. 외출할 때는 오직 시체 영안소를 방문할 때뿐. 메두사호 뗏목 위에 버려진 시체를 묘사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는 동물 사체를 집으로 가져와 부패하는 과정을 직접 본 것으로 전해진다. 1819년 ‘메두사호의 뗏목’이 그렇게 완성됐다. 굶주림, 절망, 폭력, 음울. 세상의 모든 부정이 이 작은 뗏목에 모두 담겨 있었다. 제리코가 내면의 어둠을 캔버스에 쏟아부은 결과다.
프랑스 비평계의 시선은 차가웠다. 인간의 어두움을 대면하는 데 인색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정신은 더욱 피폐해졌다. 어느 날부터는 미친 듯이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대상자는 ‘광인(狂人)’이라고 불리던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 초상화였을지, 자화상이었을지. ‘광인의 연작’이다.
1824년 1월 그가 죽었다. 낙마 사고 후유증이었다. 그가 죽은 지 16년 후. 건실한 청년이 그의 무덤 앞에 섰다. 제리코의 버려진 아들 조르주 이폴리트였다. 세상이라는 파도에 갓난아이를 던져버린 무정한 아버지였지만, 조르주는 그래도 부친을 잊지 않았다. 아버지 조각상을 무덤에 올리고, 아래에는 ‘메두사호의 뗏목’ 조각을 놓았다. 아들 조르주가 아버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참배였다.
예술이라는 뗏목에 걸린 도덕의 사슬을 끊고 광기라는 새로운 섬으로 여행을 떠났던 화가 제리코. 우리는 덕분에 지극히 어두운 풍경에서도 예술적 미감을 찾을 수 있게 됐다. 16년 만에 자신을 찾아온 조르주에게 제리코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3호 (2025.06.09~2025.06.17일자) 기사입니다]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