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5.29 20:30:53
29일 서울 중구의 한 오피스 빌딩 지하 주차장이 설치된 전기차 충전구역. ‘보수 중’이라는 입간판이 차량 출입을 막고 있었다. 이곳에 설치된 충전기 3기는 오랫동안 쓰지 않아 먼지만 뽀얗게 쌓여 있었다. 해당 전기차 충전사업자(CPO)는 경영난을 버티지 못해 전기요금을 미납했고, 급기야 지난 3월 폐업했다. 메르세데스-벤츠 하이브리드 차량을 타고 이곳을 찾은 A씨는 “스마트폰 앱에서 가까운 전기차 충전소로 이곳이 뜨길래 왔는데 문을 닫은 줄 몰랐다”며 당황해했다.
전기차를 5년째 타고 있다는 자영업자 정석현 씨(37)는 “정부에서 급속 충전 인프라스트럭처를 확충한다고 하는데 막상 서울 시내에서 급속 충전소를 찾기가 힘들다”며 “아파트 주차장을 비롯해 대부분 충전기가 완속인데, 바쁜 자영업자가 어느 세월에 충전을 기다리느냐”고 토로했다. 하이브리브 차량을 운전하는 유동근 씨(54)도 “충전을 하러 가도 막상 단말기 고장으로 충전을 못할 때가 많다”며 “유지·보수에도 신경을 써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 현상이 장기화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 대기업 계열 충전 사업자들이 잇달아 폐업 또는 매각을 결정하면서 전기차 이용자가 필요할 때 충전을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플러그 패닉’이 확산되고 있다.
이날 전기차 충전 업계에 따르면 한화큐셀이 이달 CPO 계열사인 한화모티브의 충전기 1만6000여 기를 플러그링크에 매각하고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하기로 했다. 앞서 지난 4월 LG전자 역시 야심 차게 진행했던 전기차 충전기 제조업을 3년 만에 접었다. SK네트웍스도 CPO 기업인 SK일렉링크 지분 일부를 홍콩계 사모펀드 앵커에퀴티파트너스(앵커PE)에 매각하고 최대주주 자리에서 내려왔다. 업계에서는 리밸런싱을 진행하고 있는 SK가 결국 전기차 충전 사업에서 손을 뗄 것으로 보고 있다.
캐즘 현상 외에도 민간 인프라 투자 여건을 조성하지 못한 정부 정책이 플러그 패닉 확산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정부가 사실상 충전요금을 동결하고 전기차 충전 생태계에서 민간 사업자와 직접 경쟁하는 게 문제라는 지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한국의 전기차 1대당 공용 충전기 수는 5년 연속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빠르게 충전할 수 있고 회전율이 높은 급속 충전기(충전시간 40분 안팎)가 턱없이 부족해 실사용자의 체감 품질은 바닥이라는 게 업계 얘기다.
특히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급속 충전기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급속 충전기 1대가 담당하는 전기차 대수는 지난달 기준 전국 평균 15.8대인데 서울(17.1대), 대전(18.6대), 대구(22.0대), 부산(26.8대), 인천(32.7대) 등 대도시일수록 더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도시에 충전소가 부족한 것은 환경부의 ‘로밍 네트워크’ 정책 때문이다. 로밍 네트워크는 전기차 사용자가 여러 CPO의 전기차 충전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 플랫폼이다. 로밍 네트워크에 가입한 사업자는 환경부의 충전시설 보조사업 사업수행기관 선정 때 가점을 받는다. 해당 보조사업에 선정돼야 국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로밍 네트워크 가입 사업자는 충전요금 인상에 제한을 받는다. 또 지역에 관계없이 동일한 요금을 책정해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도심 핵심 지역은 한적한 외곽보다 임차료가 훨씬 비싼데 동일한 요금을 받아야 한다”며 “여기에 캐즘 현상 장기화로 수요도 뒷받침하지 못하니 도심에 전기차 충전소를 지을 매력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환경부가 충전요금을 3년째 동결하고 있는 마당에 전기요금은 폭등하면서 업계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환경부는 전국에 설치한 충전소를 민간에 이양하는 시범사업을 진행했지만, 올해 들어 당분간 직접 환경부가 운영을 유지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환경부 관계자는 “CPO 업계에서 환경부가 운영하는 충전소를 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충전요금을 올리기 위한 것”이라며 “이때 전기차 보급에 지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민간 업자들의 과도한 요금 인상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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