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지난 25일 실시된 총선·지방선거를 외면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투표율이 10%대에 불과했다. 결과는 여당의 압승. '민주주의 꽃' 선거를 통해 주권자 의지가 발현된다. 이런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데에는 투표의 의미가 퇴색한 탓이 크다.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 심판론이 커진 상황에서 치러진 지난해 대선에서 여론조사, 출구조사 결과와 다르게 야당 후보가 패배했다. 당시 베네수엘라 선거관리위원회는 대선 투표 종료 후 6시간여 만에 개표율 80%대에서 마두로 당선을 발표했다. 국내외 비판 여론에 직면했지만, 대법원은 선관위 발표를 인정했다.
대법원 판단까지 받아 겉으로는 문제없어 보인다. 하지만 마두로의 정치적 스승인 우고 차베스의 사법부 장악이 정권 연장을 도왔다. 행정부의 달콤한 포퓰리즘에 빠진 시민들 지지로 입법권을 장악한 차베스가 2004년 대법관 수를 20명에서 32명으로 늘렸다. 이들 전원을 친정부 인사로 채웠다. 마두로는 2022년 대법관 수를 다시 20명으로 줄였지만, 이 과정에서 정권에 충성하는 대법관들 위주로 대법원을 추렸다.
작년 대선에서 유명무실해진 삼권분립을 확인한 시민들은 올해 선거에 보이콧으로 답했다. 결과가 정해진 선거에 누가 투표하고 싶겠는가.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에도 베네수엘라는 '차베스-마두로' 정권의 포퓰리즘으로 인해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빈국으로 전락했다. 되돌리고 싶어도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손에 든 카드가 없다.
높은 전문성이라는 특징으로 사법부는 선거가 아닌 고도의 법률 지식을 갖춘 전문가로 구성된다. 인기가 절정에 올라 행정·입법부를 장악한 정치세력은 '국민 뜻'이라는 미명 아래 사법부 장악이라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민주주의 기초인 삼권분립이 붕괴하면 향후 선거는 요식행위라는 점을 베네수엘라에서 확인했다.
우리 대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반도에 자유 민주주의가 이어질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 필요한 순간이다.
[김덕식 글로벌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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