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칩 워] -10화: 우주 반도체 공장

영국 스타트업 스페이스포지(Space Forge)가 우주에서 반도체와 양자 컴퓨팅에 사용될 첨단 소재를 생산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목표 시점은 올해 입니다. 스페이스포지는 이를 위해 2260만 파운드(약 420억원) 규모의 시리즈 A 투자 유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는데요. 이는 영국 우주 기술 분야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투자라고 자평했습니다.
이들은 투자금을 활용해 차세대 위성 ‘포지스타2(ForgeStar-2)’ 개발과 함께 최초의 우주 제조용 위성인 ‘포지스타1(ForgeStar-1)’을 2025년에 궤도에 진입시키려고 합니다. 왜 우주에 인공위성을 보내 제품 생산에 나서려는 것일까요. 스페이스포지는 “우주는 미세 중력, 진공, 극단적인 온도 차이 등 지구와는 다른 독특한 물리적 조건을 갖춘 환경이며, 이러한 환경을 활용하면 지구에서는 제조할 수 없는 차세대 소재를 생산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스페이스포지는 “이러한 소재는 반도체, 양자 컴퓨팅, 청정 에너지, 국방 기술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 혁신적인 응용이 가능하며, 특히 인프라 및 데이터센터 분야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최대 75%까지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월드펀드의 파트너인 다리아 사하로바는 이를 놓고 “현재 세계가 첨단 반도체를 대만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정학적 위기가 발생할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스페이스포지는 이러한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월드펀드는 이번 투자에 참여한 세계 최대 기후 기술 펀드입니다.)
스페이스포지의 로드맵은 이렇습니다. 먼저 미국 법인을 중심으로 미국 내 반도체 공급망 자립을 목표로 하는 ‘반도체 지원법(CHIPS and Science Act)’에 발맞춰 현지 생산 시스템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스페이스포지 미국 법인 대표인 미셸 플레밍은 “미국 내에서 완전 통합형 반도체 제조 역량을 확보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회수 및 재사용이 가능한 제조 위성인 포지스타1은 2025년 첫 궤도 시험 임무를 통해 고성능 소재의 우주 제조 가능성을 실제로 검증할 계획입니다.
지구에서 반도체 소재를 만드는 것과 우주에서 만드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인류는 지구에서 대부분의 물질을 제조해왔습니다.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중력과 대기의 영향 때문입니다. 완벽하게 순수한 성분을 조합하거나 고순도 합금을 만드는 일은 지구 환경에서는 매우 어렵습니다.
스페이스포지의 CEO 조슈아 웨스턴은 “지구에서 고속의 원심분리로 알루미늄과 나븀을 섞어도 결이 좋은 합금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중력 때문인데요. 반면 미세중력(microgravity) 상태의 우주에서는 부력의 방해 없이 원소들이 고르게 섞이고, 결정체도 균일하게 형성됩니다. 즉, 훨씬 더 정밀하고 뛰어난 재료가 만들어질 수 있는 환경인 것입니다.

게다가 우주는 지구보다 훨씬 더 깨끗합니다. 지구의 대기는 초미세먼지, 오염원, 방사선에 노출돼 있지만, 우주는 그야말로 청정 상태입니다. 우주 환경은 극한의 온도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입니다. 위성의 위치를 조정하면 절대영도에 가까운 영하 273도에서, 반대로 태양을 향해 노출하면 270도 이상의 고온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초전도체나 양자 소자 같은 정밀 소재를 생산하는 데 매우 유리한 조건입니다.
초전도체(superconductor)는 특정 온도 이하로 떨어졌을 때 전기저항이 ‘0’이 되는 물질입니다. 즉, 전류 손실 없이 전기를 흐르게 할 수 있는 이상적인 물질이지만, 이 현상은 대부분 매우 낮은 온도에서만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NbTi(니오븀-타이타늄) 합금은 약 −263°C에서 초전도 상태가 됩니다. 지구에서는 이 온도를 만들기 위해 액체헬륨 같은 고가의 냉매가 필요하지만, 우주에서는 이러한 조건이 자연스럽게 조성됩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우주의 고온 환경입니다. 위성의 위치를 조정해 태양을 향하게 하면, 외부 온도가 +250°C 이상까지 올라갑니다. 이런 고온 조건은 특정 합금의 용해, 결정화, 또는 표면 구조를 제어하는 데 적합한 환경입니다.
예컨대, 양자점(Quantum Dot)이나 양자 우물(Quantum Well) 같은 양자 소자들은 원자 단위에서의 구조적 정밀성이 요구됩니다. 초정밀 열처리가 필요한데요. 지구에서 이런 공정을 하기 위해서는 진공 챔버와 고온로 등 복잡한 장비가 필요한데요. 하지만 우주에서는 진공과 고온 환경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어 정밀도가 높은 구조체를 더욱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또 반도체의 기초가 되는 실리콘 웨이퍼는 결정 구조가 얼마나 ‘완벽하냐’에 따라 품질이 결정됩니다. 우주에서는 미세중력 상태에서 균일한 결정 성장이 가능해 결함 밀도가 매우 낮은 실리콘 결정을 제조할 수 있습니다. 고순도 실리콘은 고성능 전력 반도체에 적용 가능합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차세대 반도체 소재로 불리는 화합물 반도체인 갈륨 나이트라이드(GaN), 실리콘 카바이드(SiC) 역시 가능합니다. 이들 화합물은 전기차, 5G, 군사 레이더, 우주항공 장비 등에 필수적입니다. 제조 공정이 복잡하고 고온·고진공 환경이 필요한데, 우주는 이러한 환경을 자연적으로 제공합니다. 이들 소재를 활용할 경우 고출력 레이저, 고주파 전력 증폭기, 전기 추진 로켓 등에 응용이 가능해집니다.
이뿐일까요. 위성용 정밀 센서, 군사·의료용 탐지 장비에 사용할 수 있는 소재인 인듐 안티모나이드(InSb), 인듐 비스무타이드(InBi)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주의 미세중력 환경은 불순물 확산 없이 균일한 박막 성장을 가능하게 해 줍습니다.
스페이스포지는 이런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약 2~6개월간 우주 궤도에서 제조를 진행한 후, 이른바 ‘공장 파트(factory module)’만을 분리해 지구로 귀환시키는 방법입니다. 위성 본체는 궤도에 남아 ‘재활용 공장 파트’를 새로 붙여 다시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일종의 모듈형 위성인 셈입니다. 올해 첫 위성을 발사한 이후 매년 10~12기의 제조 위성을 쏘아 올리는 구조인데요. 이를 통해 5년 내 연간 100기 이상의 공장 위성을 활용하겠다는 포부도 내비쳤습니다.
물론 아직은 꿈입니다. 고진공, 정밀 온도 제어, 자동화 제조 시스템이 들어간 위성은 일반 통신 위성보다 훨씬 고가일 뿐 아니라 위성 1기당 발사비는 수백만~수천만달러에 달합니다. 생산 단가가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배 비싸질 수 있습니다. 또 우주에는 자연 방사선, 태양 플레어, 우주 쓰레기 충돌 위험이 존재합니다. 이런 요소들이 미세한 공정이나 전자 장비에 치명적 오류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은 염려됩니다. 다만 지구에선 절대 만들 수 없는 ‘완전무결한 소재’를 제조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입니다.
지금은 우주에서 제조한다는 발상이 낯설 수 있습니다. 또 당장 성공하리란 보장 역시 없습니다. 하지만 괴짜들의 꿈이 언젠가 이뤄질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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