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저성장을 넘어 ‘무성장’으로 치닫는다.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잠재성장률이 급감하는 동시에, 반도체·석유화학·자동차 등 주력 산업은 중국 등 라이벌 국가 공세에 밀려 좀처럼 경쟁력을 회복하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발 빠르게 구조 개혁에 나서지 않으면 ‘잃어버린 30년’을 겪은 일본, 10년간의 저성장을 극복하지 못하고 경제가 완전히 주저앉은 이탈리아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日 ‘잃어버린 30년’ 후 경쟁력 악화
伊 유럽 강국에서 ‘문제아’ 전락
0%대 성장이 계속되면 한국 사회는 이전에 겪지 못했던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한국보다 먼저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국가들이 겪었던 문제를 그대로 답습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과 사회적 분위기가 비슷하고, 제조업·수출 중심 경제 체제를 갖춘 일본은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잃어버린 30년’이라 불리는 장기 저성장을 겪었다. 이 기간 일본은 경제, 사회적 지표가 크게 후퇴했다. 1993년 일본 GDP가 세계 전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7.7%에 달했으나, 현재는 5%대로 감소했다. 민간기업 소득 악화가 가계 소득 감소로 이어지고, 소득 감소는 곧 빈곤층을 증가시키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저성장이 절정이던 2016년 일본 지니계수는 0.48로 정점을 찍었다. 지니계수는 경제적 불평등함을 측정하는 지표다. 1에 가까울수록 양극화가 심한 사회다. 빈곤층 증가는 각종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빈곤의 대물림을 끊고자 결혼을 포기하는 젊은이가 늘면서 출산율이 급감했다. 이미 ‘일본화’의 조짐은 곳곳에서 보인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출산율이 가장 낮다. 저성장이 심해지면 해당 지표는 더 악화될지 모른다.
2005년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경제 강국 이탈리아는 20년이 넘는 저성장 끝에 국가 경제 자체가 주저앉았다. 이탈리아는 최근 17년간 1% 정도 성장률을 보였으며 마이너스 성장도 여러 차례 기록했다. 구조 개혁보다 복지 확대에 힘을 기울였던 이탈리아는 경제 강국서 한순간에 ‘문제아’로 자리 잡았다.
이탈리아의 GDP 대비 국가 부채비율은 2008년 106.1%에서 2023년 137.3%까지 치솟았다. 유로 지역에선 그리스(160.3%) 다음으로 높다. 돈 풀기 정책이 부채를 키우고, 이는 성장을 낮추면서 다시 부채를 늘리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동시에 인프라·산업 지원에 쓰일 돈이 복지로 나가면서 투자는 매년 위축됐다.
투자가 줄면서 산업은 활력을 잃었고, 젊은이를 위한 일자리는 감소했다. 한때 이탈리아 청년 실업률만 45%에 달했다. 고국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자 청년들은 모국을 버리고 타국으로 나갔다. 해마다 4만명씩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떠났다. 이는 고령화를 가속화하는 악재로 작용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과 비슷한 탄탄한 경제력을 갖춘 국가로 평가받던 이탈리아는 어느덧 한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저성장 쇼크 피하려면
골든타임 곧 끝난다…구조 개혁 ‘필수’
일본과 이탈리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구조 개혁에 서둘러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한국 경제를 살릴 골든타임을 놓치는 순간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을 것이란 우려다.
가장 시급한 대책으로는 노동 시장 개혁을 비롯한 ‘경제 구조 개혁’이 꼽힌다. 현재 한국 경제는 기업 투자와 생산성 향상을 막는 고질적인 규제, 경직화된 근로 시간과 임금 체계 등으로 활력이 사라진 상태다. 규제를 적극적으로 완화하는 동시에, 노동 시장 유연화로 비노동 인구의 노동 참여율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고령화 대응을 위해 여성, 청년, 고령 인구의 노동 시장 참여 확대가 필수다. 생산성 혁신을 위한 규제 완화, 기술 투자도 병행해야 한다”며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이중 구조 개선, 연공서열이 아닌 성과 중심의 노동 시장 개편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같은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정부 역할을 축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본 정부는 저성장 극복을 위해 ‘무제한 돈 풀기’와 같은 정부 주도 경기 회복책을 적극 도입했다. 그러나 기대효과는 미미했고, 시장에 무리하게 돈을 푼 일본 정부의 재정적자만 악화됐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주도한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시장을 통해 (국가의) 성장동력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부가 국가 성장을 모두 주도할 수는 없다. 정부 재정적자, 국가 부채만 늘어나고 경기 회복이 되지 않는 일본처럼 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이끈다기보다는 민간 스스로가 시장을 창출하고 새로운 산업을 발굴해 투자할 수 있도록 탄탄한 생태계를 만들어줘야 한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의 진단이다.
이탈리아식 저성장을 막기 위해선 전략적·효율적 재정 운용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새겨들을 만하다. 2000년대 이탈리아를 이끌던 베를루스코니 내각은 경제 구조 개편에 힘을 쓰지 않았다. 당장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 포퓰리즘 정책만 내세웠다. 골든타임을 놓친 이탈리아 경제는 손을 쓸 수 없도록 망가졌다.
강병구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복지 국가의 지속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무작정 분배만 내세웠다간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불러온다.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하는 사회경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무성장 시대를 타개하는 핵심 전략”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국가적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줄이라는 주문이 나온다. 지난해 말 불거진 계엄 사태 이후 한국 사회는 불확실성이 높아졌다. 정치와 사회가 안정적이지 못하면, 경제도 불안정해진다. 이는 곧 기업의 투자 감소 원인이 된다.
“불안정과 불확실성이 계속 이어지면 국내 투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투자자들이 불안한 국내보다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탓이다. 이미 주력 산업의 해외 투자는 속도를 내고 있는데, 투자 감소는 곧 성장 악화를 뜻한다. 지금이라도 국내 투자 유도를 위한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의 일성이다.
[반진욱 기자 ban.jinuk@mk.co.kr, 조동현 기자 cho.donghyu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0호 (2025.05.21~2025.05.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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