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협 요인 1. 중국발 치킨게임
수익보다 ‘출하량’ 늘리기 집중
재계에서는 K반도체에 가장 위협적인 요인으로 중국의 공세를 지목한다. 중국 반도체 칩 메이커들은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레거시(범용) D램 시장을 중심으로 존재감을 높이고 있다. 저렴한 가격과 물량 공세로 D램 가격은 중국 칩 메이커가 결정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틀린 말이 아니다. 당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실적 설명회 자리에서 중국 반도체 업체의 범용 제품 공급이 늘면서 실적에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범용 D램 가격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램 범용 제품(DDR4 8Gb1Gx8)의 평균 고정 거래 가격은 2018년 8.19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지난 3월 말 기준 1.35달러까지 하락했다. 중국의 저가·물량 공세가 범용 D램 시장 혼돈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란 의미다.
혼돈의 중심에는 CXMT가 있다. 2016년 설립된 CXMT는 10년도 채 안 된 기간 동안 급성장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시장 ‘메기’로 떠올랐다. 지난해 말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주력 제품인 DDR5 양산에 돌입해 반도체 시장에 충격을 줬다. 중국 반도체 기술력이 급성장하기는 했지만 한국과 비교하면 한참 뒤처진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CXMT의 DDR5 성능이 한국 반도체 기업과 별 차이가 없다는 분석이 나왔다.
무엇보다 공격적 설비 투자로 DDR4, LPDDR4X 등 범용 D램 전반에서 영향력을 행사 중이다. 반도체 업계는 CXMT가 범용 D램을 시중 가격보다 50% 할인해 판매한다는 의혹까지 제기한다. 덤핑 수준으로 저렴한 값에 물량 공세를 펼치다 보니 점유율은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반도체 업계가 추산하는 CXMT의 D램 점유율은 출하량 기준 5% 안팎이다. 대만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당초 2019년 초반까지 0%대에 머물던 CXMT 점유율은 지난해 1분기 기준 5~6%대까지 올라왔
다. 일각에선 CXMT가 올해 D램 시장에서 점유율을 10%대까지 확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대만 낸드플래시 기업 실리콘모션의 고 지아장 최고경영자(CEO)는 “DDR4 D램 등 메모리 양산과 함께 CXMT 생산능력이 개선돼 2025년 말까지 시장점유율이 15%까지 높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도체 업계는 저가 공세와 공격적인 투자 규모를 고려하면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중국 칩 메이커 3사(SMIC·CXMT·YMTC)의 올해 설비투자(Capex)는 165억달러로 예상된다. 지난해 대비 16.8% 증가했다. 금액 기준으로 2022년(162억달러) 이후 역대 최대 규모다.
대규모 투자를 이끄는 곳은 CXMT다. 올해 전년 대비 44.7% 늘어난 설비투자를 집행할 전망이다. 미래에셋증권은 최근 발간한 중국 반도체 인뎁스 리포트에서 “설비투자 규모를 고려하면 CXMT의 생산능력(캐파) 증가율은 전년 대비 56.5%로 중국 칩 메이커 중 가장 큰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그야말로 선(先)출하, 후(後)수익 전략이다.
이를 두고 재계에선 과거 중국의 디스플레이 시장 공세를 떠올린다. 한국은 2004년부터 일본을 제치고 액정표시장치(LCD) 디스플레이 시장점유율 1위를 지켜왔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중국이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결국 2021년 한국은 중국에 1위 자리를 내줬다.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들은 중국이 LCD 시장을 장악한 요인으로 ‘저가 공세’ ‘공급 과잉’을 꼽는다. 디스플레이 시장에 저렴한 가격과 물량을 앞세워 혼돈을 야기하고 치킨게임을 시작해 1위 사업자로 올라섰다는 분석이다. 지금의 범용 D램 시장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리서치 업체 테크인사이츠의 댄 허치슨 부회장은 “CXMT 시장점유율이 여전히 낮은 편이지만 빠른 성장세로 ‘스노볼 효과(눈덩이가 점점 커지듯 작은 변화가 커다란 변화를 유발하는 현상)’를 만들고 있다”며 “과거 메모리 부문에서 한국이 일본을 몰아낸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위협 요인 2. 비시장적 정부 지원
美 반도체 규제로 투자 불붙어
중국 칩 메이커가 수익이 아닌 출하량에 집중할 수 있는 건 정부 지원 덕분이다. 중국 정부는 2015년 5월 ‘중국제조 2025’ 계획을 발표하고 반도체 산업을 육성했다. 올해가 만 10년째 되는 해다. 이를 위해 중국은 일관된 정책 방향성을 이어왔다. 3차에 걸친 대규모 기금 투자도 단행했다. 주목할 대목은 차수를 거듭할수록 투자 규모가 커졌다는 점이다. 초기에 대규모 투자 지원 정책을 펼친 뒤 점차 투자 규모를 줄여나가는 일반적인 정책 논리와 맞지 않는다. 반도체 업계에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비시장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지난해 5월 중국 정부는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펀드(대기금) 3기 설립을 공식화했다. 총 지원 규모는 3440억위안(약 67조원)이다. 여기에 1조5000억위안(약 300조원) 규모 지원금이 추가 유입될 것으로 보인다. 앞선 1·2기 대기금 규모를 합친 것보다 많은 역대 최대 규모다. 1기 대기금은 5145억위안, 2기 대기금은 8166억위안이다. 중국 정부는 올해를 시작으로 향후 10년 동안 3기 대기금을 반도체 산업 등에 지원할 방침이다.
중국 정부가 이전보다 강력한 지원책을 내세운 배경에는 미국의 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가 자리한다. 미국 규제가 단기적으로는 중국 측에 부담으로 작용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기술 국산화와 공급망 자립화라는 방향성을 강화하게 만든 요인이 됐다는 설명이다.
박연주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는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가 야기한 중국 내 혁신 가속화 현상은 이른바 ‘포터 가설(Regulation-Induced Innovation Hypothesis)’의 대표 사례”라고 설명했다. 포터 가설의 핵심은 규제가 결과적으로 기업 또는 산업의 기술적 효율성과 경쟁력을 자극하는 촉매가 될 수 있다는 것. 박연주 애널리스트는 “미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가 오히려 중국의 국산화 프로젝트에 불을 붙이는 기폭제가 됐다”고 분석했다.

위협 요인 3. 기술 격차 축소
핵심 인력 빠져나가고 기술 유출
범용 D램을 넘어 첨단 공정에서도 중국의 추격이 시작됐다.
최근 CXMT는 차세대 D램으로 평가받는 DDR5와 HBM 시장에 진입했다. CXMT는 1.5나노미터(㎚) 공정으로 지난해 말 DDR5 생산을 시작했다. 주요 외신과 반도체 업계는 70% 이상 수율을 내고 있는 것으로 점친다. 수율은 생산품에서 정상품 비율을 의미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다행히 제품 성능은 국내 기업과 비교했을 때 차이가 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 대비 4~5년 전 수준인 DDR5 1세대급”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대규모 지원을 퍼붓고 있어 안심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HBM 부문도 마찬가지다. 정부 지원에 더불어 확실한 고객사가 존재해 개발에 속도가 붙는 모양새다. 대표적으로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의 추론 모델 ‘R1’은 화웨이 ‘어센드(Ascend) 910C’ 칩을 활용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반도체 업계는 2~3년 내 중국 HBM이 어센트에 적용될 것으로 예상한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애널리스트는 “CXMT는 2026년 4세대(HBM3)와 2027년 5세대(HBM3E) 개발을 목표 중”이라며 “향후 2~3년 내 중국산 HBM이 화웨이 어센드 시리즈에 탑재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2023년 HBM3E 개발을 완료한 점을 고려하면 기술 격차는 4년 정도인 셈이다.
인재·기술 유출 추이를 고려하면 한국과 중국 간 격차는 생각보다 빠르게 좁혀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적발된 해외 기술 유출은 총 27건이다. 이중 중국으로 유출된 건수가 20건에 달했다. 기술별로는 반도체가 9건으로 가장 많았다. 서울중앙지검 정보기술범죄수사부는 최근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첨단 기술을 중국 경쟁사에 유출하려던 SK하이닉스 직원 A씨를 산업기술의 유출 방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구속했다. SK하이닉스 중국 현지법인에서 근무했던 A씨는 2022년 회사의 반도체 제조 관련 첨단 기술 자료 등 100여개 영업비밀을 중국 경쟁사로 유출한 혐의를 받는다.
인재 유출 시도도 잦아지고 있다. 국내 반도체 기업 핵심 인력에 대한 중국 반도체 기업의 영입 공세가 거세다는 게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의 일관된 설명이다. 국내 반도체 장비사의 한 임원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뿐 아니라 팹리스와 반도체 장비사도 타깃이 된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8호 (2025.05.07~2025.05.1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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