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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민의 문화 이면] 어떤 역사의 죽음

글로 쓴 역사는 관점의 산물
땅 아래 역사는 생생한 증언
근대 이후 인류 발전 과정서
과거 흔적은 다 폐기물 처리
문자·사진·영상으로만 남아
실체 잃은 듯 상실감 밀려와

  • 기사입력:2025.05.23 17:35:28
  • 최종수정:2025-05-23 17: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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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번성했던 문명 위로 흙이나 모래가 쌓이면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이 된다. 한동안 불모지로 버려져 있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누군가가 찾아와 집을 짓고 문명을 일군다. 인류의 역사는 이 과정의 반복이었다.

트로이전쟁은 한때 상상과 허구의 이야기로 취급됐다. 그러다가 하인리히 슐리만이라는 사람이 오늘날 튀르키예의 히사를리크 언덕 밑에서 이를 실제로 발굴했다. 트로이 유적은 5개의 고대 시대 유적이 중첩돼 있었다. 가장 위층은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이고, 그 아래층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도시였다. 그 아래를 더 파고 내려가면 우리가 아는 트로이전쟁의 현장인 성벽이 나온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 아래로 2개의 역사층이 더 남아 있다. 청동기 시대 중후기의 유적과 석기 시대 트로이 유적이다. 트로이는 40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 긴 시간이 3개의 지하 토층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가면 지형이 봉긋하게 솟은 곳들이 있다. 전체적으로 불룩해서 거대한 무언가가 묻혀 있는 느낌을 주는 언덕이 있다. 그 아래엔 유적지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성벽과 마을이 나오기도 하고 도시 전체가 묻혀 있는 경우도 있다.

2005년 방영된 10부작 실크로드 다큐가 있다. 나는 이 다큐를 좋아해서 여러 번 시청했다. 제1편의 제목은 '4000년의 깊은 잠'으로 타클라마칸 사막 초입에 있는 룰란 왕국의 번성과 종말을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룰란 지역의 고대 묘지인 '시아헤 묘지(Xiaohe Tombs)'에 대한 발굴 조사다. 약 8m 높이의 자그마한 모래 둔덕이 있는데, 호양나무를 깎아서 만든 나무 기둥들이 무질서하게 꽂혀 있는 모습은 폐허 그 자체다. 이 작은 둔덕 아래에 1000개가 넘는 관이 묻혀 있다고 한다. 과거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무덤 위에 또 무덤을 만드는 식으로 거대한 산을 쌓았는데 몇 겹의 층을 뚫고 들어가자 동물 가죽으로 관을 봉인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여성 미라가 출토됐다. 우뚝한 코며 위로 말린 속눈썹까지 완벽하게 보존된 미라였다. 코카서스 인종으로, 전형적인 서양인의 외모인 미라는 무려 4000년 전의 사람이었다.

룰란은 실크로드 남쪽 루트와 북쪽 루트를 연결하는 요충지에 위치해 5세기까지 번성하다가 갑자기 사라진 왕국이다. 나는 '누란(樓蘭)'이라는 한자 이름에 더 익숙하다. 다큐를 보면서 스무 살에 읽었던 송재학의 시 '누란에의 기억'을 떠올렸다. 시인은 "누란에서 죽음은 노래가 되는 것"이라 했고 "지금 모래 무덤 파면 누란은 호박(琥珀)이나 옛 노래 몇 절로 고여 있다"고 했다. 내 눈에는 4000년의 긴 잠을 자고 있는 미라 여인이 고여 있는 노래처럼 여겨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눈썹을 따라 노래가 풀려나와 사막의 하늘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역사는 책에 쓰여 있는 게 아니라 땅 밑에 있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사라지지 않고 우리가 딛고 있는 땅 밑에 그대로 살아서 위쪽을 쳐다보고 있다. 그래서 섬뜩하다. 책으로 쓰인 역사는 관점과 선택의 산물이다. 과장과 축소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새빨간 거짓으로 밝혀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유적은 거기에서 자유롭다. 말이 없을 뿐 많은 것을 무언으로 증언한다.

하지만 자연히 역사가가 돼 써 내려가는 지하의 역사책은 이제 절판됐다. 근대 이후 인류의 행보는 이런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초가집이 기와집으로, 기와집이 양옥집으로, 양옥집이 아파트로 바뀌어 왔지만, 그것들은 땅에 묻히지 않고 전부 폐기물 처리되었다. 20세기 이후 인류의 진정한 역사는 진정으로 사라져버렸다.

내가 사는 이 동네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논밭이었고, 자그마한 마을들이 흩어져 있는 동네였다. 그러나 지금은 신도시가 들어서 있다. 신도시는 지하 수십 m를 통째로 비우고 철심을 박아 건설된다. 과거 따위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한때 존재했던 동네는 오직 인간의 기억, 문자, 사진, 영상 속에만 남아 있다. 역사의 '실체'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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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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