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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아내 마크해줬다 봉변 [정현권의 감성골프]

  • 정현권
  • 기사입력:2025.06.20 21:00:00
  • 최종수정:2025.06.20 2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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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에 올라온 동반자 아내를 위해 마크해주고 공을 건넸더니 그게 달갑지 않았던가 봐요.”

부부 동반 골프 후에 귀갓길 차 안에서 아내가 말문을 닫은 이유였다고 지인이 전했다. 자기 퍼트 라인 바로 앞에 공이 떨어졌길래 무심코 베푼 선의가 아내로선 과잉 매너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부부 골프는 생각보다 민감하다. 자칫하면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간다.

“저도 골프를 끝내고 식사 도중에 겹친 깻잎을 분리하려고 애쓰는 상대 아내를 위해 젓가락을 동원했다가 비슷한 경우에 처했어요.”

보다 못해 도와줬는데 그렇게까지 섬세하게 배려하냐며 아내에게서 핀잔을 받았다고 또 다른 지인이 토로했다. 상대가 그늘 집에서 비싼 식음료를 마구 집어 들어 난처해진 사례도 있었다. 아내는 별로 먹고 싶지도 않았는데 비용은 공유했다며 그들과 다시는 회동하고 싶지 않다는 불만을 감수한 지인도 있었다.

골프와 자동차는 부부끼리 하면 싸운다는 말이 있다. 개인 종목이면서 단체 종목이기 때문이다. 개인 성향이 강하게 투영된다.

부부 골프 십계명이 있다. 구력 있는 아내라면 공도 가능하면 혼자 찾게 하고 멀리건을 쓰든지 말든지 내버려둔다. 그린에서는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고 마크도 캐디나 본인이 직접 하도록 한다.

그린에서 남편이 아내 공을 매번 마크하고 공을 집어주기도 하는데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기 힘들다.

18홀 내내 가능하면 말수를 줄여 각자 경기에 몰입한다. 묻지 않으면 레슨은 금물이고 그늘 집에서나 경기를 끝내고 식사하며 대화한다.

경기 도중 사진을 찍자는 아내 제의에는 즉각 응한다. 리듬을 끊는다며 무시하고 그대로 진행하다가는 후환이 두렵다. 마마와 호환보다 무서운 게 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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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하우스나 그늘 집에서는 마누라에게 주문 권리를 준다. 주류 메뉴도 아내가 정하도록 한다.

라운드 돌고 샤워를 끝낸 다음에는 군말없이 소파나 차안에서 기다린다. 언제까지 나오라고 아내에게 절대 요구하지 않는다.

귀갓길에 가능하면 골프 얘기는 하지 않고 혹시라도 아내 골프 매너가 동반자를 불편하게 만든 순간이 있었더라도 일단 넘어간다. 그날 골프에 대해 물어보면 저번보다 좋아졌다고 답한다. 그리고는 일찍 잠든다.

“남편이 생각보다 또박또박 잘 봐주더라고요.” 언젠가 남편 남기혁을 캐디로 대동한 박인비가 기자들에게 답한 소감이다.

박인비는 특유의 은은한 미소를 담아 늘 단문으로 답한다. 짧은 소감에 남편에 대한 깊은 애정과 고마움이 묻어난다.

박인비를 보면 ‘골프는 가정에서 나온다’는 생각마저 든다. 집에 걱정거리가 있거나 아내와 불화하고 나오면 그날 골프는 물 건너간다.

용인 화산CC에서 어느 부부 한 쌍과 골프를 한 적 있다. 골프장 회원인 부부는 자기들 방식으로 내기를 했다.

홀을 거듭할수록 그 부부의 내기를 지켜보는 게 흥미로웠다. 페널티 구역에선 엄격하게 룰을 적용하고 멀리건은 물론 컨시드도 없었다.

서로 말도 없어 긴장감이 돌아 걱정 투로 물었다. “진짜 부부 맞아요? 낼 모레 이혼할 사람처럼 너무 살벌하네요.”

“아, 우린 오래전부터 이렇게 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게임은 진지했지만 공을 함께 찾고 대부분 홀을 부부가 나란히 걷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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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90대 안팎으로 정확하게 스코어를 매기고 경기를 마쳤다. 인근 맛집에서 수육과 막국수를 먹으면서 골프 추억담과 유머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훈훈했다.

아내와 따로 골프를 즐기는 부류도 있다. 서로 원하는 사람끼리 치는 것을 용인한다. 주로 고수 세계에서 볼 수 있는데 팽팽한 긴장감을 즐기면서 승부를 좋아하는 타입이다.

자기 골프 세계가 있고 자존심도 강해 간섭받는 걸 싫어한다. 따로 친구나 동호인 모임을 즐기고 부부끼리 골프를 하더라도 자기 게임에 전념할 뿐 가르치지 않는다. 간혹 클럽하우스에서 마주치기도 한다.

그래도 부부간 엄격한 룰 적용은 조심스럽다. 서하남 캐슬렉스 골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부부를 초청했는데 동반자 아내가 페어웨이 내리막 경사에서 두 번이나 아이언을 휘둘렀는데 빗나갔다. 정타가 쉽지 않았다.

한 번은 완전 빈 스윙이었고 또 한 번은 공을 살짝 건드렸다. 예의 주시하던 남편이 정확하게 2벌타를 먹여 쿼드러플(기준에서 4타 초과) 보기를 매겼다.

아내에게서 내기에 걸린 돈도 악착같이 받아냈다. 부부끼리 타당 천원이었는데 아내가 배판 규정 등으로 한 홀에서만 1만6000원을 뺏겼다. 이후 아내는 침묵했고 냉기가 도는 가운데 라운드를 마쳤다. 그 후 남편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2020년 세상을 떠난 숀 코너리는 영화사에서 가장 멋지고 뛰어난 골퍼였다. ‘007 골드 핑거’에 악당의 알까기 장면이 나오는데 마지막 홀에서 상대 공을 바꾸는 역속임수로 내기에 이겨 황금 바를 차지한다.

골프 고향 스코틀랜드에서 자란 그는 영화를 찍으려고 골프를 배워 훌륭한 기량을 뽐냈다. 쇠락한 로열 트룬 골프장을 살려 디 오픈을 다시 개최한 주역이다.

모로코의 한 대회에서 ‘평생의 본드걸’인 아내 미슐링 라커브룬을 만났다. 그 대회에서 남자는 코너리, 여자는 라커브룬이 우승했다. 두 사람은 조용하고 골프장이 많은 스페인 마르베야에서 살다가 바하마에서 골프를 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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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와 아내의 공통점

① 한 번 결정하면 못 바꾼다

② 내 마음대로 안 된다

③ 힘들 때는 결별하고 싶다

④ 너무 예민하다

⑤ 웃다, 찡그렸다 변화무쌍이다

⑥ 처음 3년은 힘, 이후 기술로 승부

⑦ 시간 갈수록 고난도 기술 요구

⑧ 홀 근처만 가면 겁난다

⑨ 돈 많이 투자하면 분명 편해진다

⑩ 조강지처(골프채)가 그래도 편하다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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