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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혁칼럼] 대통령 가족이라는 멍에

권력자 일가의 부당한 행동에
국정 흔들리는건 국민의 불행
존경받는 대통령 가족 없을까
친인척 감시체계 강화해야

  • 황인혁
  • 기사입력:2025.05.20 17:42:43
  • 최종수정:2025-05-20 19: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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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수준 낮게 굴더라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시다(When they go low, we go high)."

201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미셸 오바마는 힐러리 클린턴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자리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격렬한 비방을 점잖게 비판했다. 분노는 감정일 뿐 해결책이 아니며 충동적으로 행동하면 곧장 도랑에 처박힐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셸은 누구보다 정치 공세에 시달린 영부인이었다. 백악관 생활 8년 동안 흑인 여성에 대한 비하와 편견이 그를 지치게 했다. 그때 미셸이 택한 카드는 품위 있게 가는 것이었다. 상대가 저열하게 나오더라도 자제력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2022년 저서 '자기만의 빛'에서 밝힌 고백이다.

남편의 국정 운영에 짐이 되지 않겠다는 필사의 노력은 값진 결실을 거뒀다. 버락 오바마 퇴임 후 미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2018년 출간된 그의 회고록 '비커밍'은 1800만부 이상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답지 못했다면 이런 대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의 영부인 브리지트 마크롱도 인간적 매력을 보여주는 퍼스트레이디다. 에마뉘엘 마크롱과 스물네 살의 나이 차로 종종 구설에 올랐지만 공직과 사생활의 경계를 구분하면서 조용히 헌신하는 방식으로 지지를 얻었다. 대통령 배우자가 신중한 처신으로 지도자를 뒷받침하는 모습은 부러움을 느끼게 한다.

한국의 6월 대선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탄핵에서 촉발됐지만 그 기저에 '김건희 여사 의혹'이 깔려 있다는 점을 부정하긴 어렵다. 지속적으로 더불어민주당의 공세 빌미가 됐고 윤석열 정권은 매번 코너로 몰렸다. 수신제가(修身齊家)가 안 되는데 치국(治國)이 될 리 없었다. 국정 동력 상실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대통령 일가를 둘러싼 사건은 끊임없이 반복돼온 한국 정치사의 굴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경우 딸이 청와대 관저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체면을 구겼고 김정숙 여사의 외유성 출장 의혹도 내내 시끄러웠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은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그리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아들의 구속 소식을 접해야 했다. 대통령의 불행이자 국민 모두의 수치일 수밖에 없다.

20일 김용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대통령 후보 배우자의 TV 생중계 토론을 제안했다. 배우자의 사회적 영향력이 크지만 이에 대한 검증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과연 차기 대통령은 가족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대권에 가장 가깝게 서 있는 이재명 후보의 배우자 김혜경 씨는 이미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최근 '공직선거법 위반' 2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다.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의혹은 계속 따라다니는 악재다.

한편에선 이 후보에게 잘 보이려고 이 후보 아들과 가깝게 지내려는 사람들의 얘기가 들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취임 초 쏟아지는 인사 청탁을 막으려고 박주선 당시 법무비서관(민정수석과 인사수석 역할)을 앞세웠다. 인사는 박 비서관과 상의하라고 하면서 애써 거리를 두려고 했다. 불나방처럼 몰려드는 이해관계자들을 끈질기게 경계한 것이다.

우리 앞엔 미국발 통상전쟁, 인공지능(AI) 주도권 다툼, 저성장 탈출 등 시급한 국가 현안이 산적해 있다. 차기 대통령의 임기는 한국의 명운을 가를 골든타임이 될 것이다. 중차대한 시기에 대통령 가족 문제가 또다시 국정의 발목을 잡는다면 국가 재도약의 꿈은 요원해진다. 대통령 가족에겐 일반 국민보다 몇 배는 엄격한 윤리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또한 청탁 차단을 위한 친인척 감시 체계도 한층 강화해야 한다. 그게 권력자 일가의 숙명이다.

[황인혁 지식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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