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국회에서 열린 법원조직법·공직선거법·헌법재판소 등을 심사하는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청래 위원장에게 발언 요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https://wimg.mk.co.kr/news/cms/202505/18/news-p.v1.20250518.087f0ebb61fa4b01b449531a8797d12a_P1.jpg)
필자는 지난주 ‘대학 권장 도서는 대학생 때 읽어야 한다’는 교훈을 깨달았다. 프랑스 사회심리학자 귀스타브 르봉이 1895년에 쓴 ‘군중심리’는 대학 신입생 권장도서 목록에 어울리는 책인데 30년도 더 지나 읽는 나로 하여금 허송한 세월을 탄식하게 했다. 130년 전에 나온 이 책이 오늘날 한국 사회와 정치에 관해 어떤 책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르봉에 따르면 군중은 독립된 개인으로 있을 때 하던 방식과 완전히 다른 식으로 생각하고 지각하고 행동한다. “하나같이 탁월한 능력을 지녔지만 전공 분야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일반적인 관심사에 대해 내린 결정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모여 내리는 결정보다 나은 게 없다.” 르봉은 온화한 부르조아지들이 적지 않았던 프랑스 대혁명 시대의 국민공회가 무수한 정적들을 단두대로 보낸 사실을 상기한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의원들로 구성된 더불어민주당이 30여차례 공직자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고 급기야 대법원장 탄핵을 무람없이 거론하는 최근 3년의 사태를 상기한다.
이런 현상이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벌어지는 이유는 군중의 특성에 기인한다. “군중 속 개인은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중략) 혼자였다면 교양인이었을지 모르나 군중이 되면 본능대로 행동한다.” 가령 지난 9일 저녁 국민의힘 의원 60여명이 의총장에 모여 대선후보 교체를 당 지휘부에 일임하기로 결의했을 때 그 장소에 사리를 분별하는 교양인은 없었다. 이익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원시인들이 있었을 뿐이다. “군중의 일원이 되면 개인은 수(數)가 부여하는 힘을 의식하게 된다. 이때 그에게 살인이나 약탈이란 암시를 걸면 그는 지체없이 유혹에 넘어갈 것이다.” 그날은 김문수에게서 대선후보 자리를 약탈하란 암시가 작동했을 뿐이다. 살인 암시가 작동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보불전쟁 당시 프러시아 군대가 파리로 진군해 오자 파리 시내에는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사람들은 건물 위층에 켜진 촛불을 첩자가 프로이센 군대에 보내는 신호라고 단정했다. 그때 프로이센 군대는 수십킬로 밖에 있었고 당시 기술수준으로 그 촛불을 알아볼 재간은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 루머에 동요된 군중 중에는 과학자도 있었고 지성인도 있었다. 빛나는 경력을 지닌 한국 지식인 중 일부가 전자투표 조작을 신봉하는 것처럼. 르봉은 말한다. “개인은 군중의 일원이 되는 순간 배운 자든 못 배운 자든 관찰하는 능력을 똑같이 상실한다.”
사상은 군중의 정신에 뿌리내리기도 어렵고 일단 뿌리내린 사상을 군중이 극복하기도 어렵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진 철학이 군중의 정신에 심기는 데는 거의 한 세기가 걸렸다. 일단 군중의 정신에 뿌리내린 후에는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되었다.” 왜 한국은 맹목적 반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나. 뿌리박힌 사상은 잘 변하지 않고 정치인은 본인이 믿든 안믿든 그걸 활용하기 때문이다. 4·3과 5·18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담론전개는 반지성에 가깝다. 그 반지성은 변화 조짐조차 안 보이는데 모든 정치인이 그 집단최면의 꽃밭에서 꿀을 빨아대기 때문이다.
르봉은 군중의 충동성과 변덕, 과민성에 민족의 기본적인 특성이 끼어든다고 봤다. 그에 따르면 라틴계 군중과 앵글로·색슨계 군중은 놀라울 정도로 다르다. “라틴계 군중은 권위주의와 편협함의 정도가 무척 높기 때문에 앵글로·색슨계 군중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개인의 독립성을 그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군중으로 존재할 때 라틴계가 앵글로·색슨계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얘기다. 우리는 라틴계에 가까운가, 아니면 앵글로·색슨계 쪽일까.
19세기 후반 프랑스에는 제도가 사회 결함을 개선할 수 있고 완전한 체제와 정부가 들어서면 국민도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고 르봉은 쓰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회의적이었다. “제도는 그 자체로 덕성이 없다. 제도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제도가 전부’라는 이론으로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애쓰모글루와 로빈슨이 선호할 관점은 아니다. 르봉이 한국의 지식인이었다면 최근 개헌 논의에는 퍽 냉담했을 것 같다. 그는 말한다. “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민족의 특성이지 정치 체제가 아니다.” 어떤가. 5년 단임제나, 중임제나, 내각제나 다 부질없는 짓이니 개헌 따위 잊고 살아야 하나. 나는 개헌은 필요하다고 보는 쪽이지만 개헌을 안 해서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라는 논리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한 민족의 정치 수준을 결정하는 군중 심리의 수준을 개선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군중의 정신은 부분적으로 학습과 교육을 통해 악화된다. (중략) 오늘날 불평분자와 무정부주의자를 양성하고 라틴계 국민이 장차 접어들 쇠락의 길을 닦는 곳은 다름 아닌 학교다.” 그는 다시 “프랑스의 현재 교육제도가 프랑스의 급속한 쇠락을 재촉하는 위험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프랑스는 매력덩어리이면서 동시에 위대하지만 파란도 많은 나라다. 나폴레옹 이후 200년 이상 프랑스가 유럽의 일류 자리를 차지한 적이 없었다. 르봉이 지적한 프랑스의 교육과 그 결과로서 군중심리 수준이 그들을 이류에 머물게 하는 것은 아닌가.
대한민국의 학교는 어떤가. 기성세대야 그렇다 치고 지금 그곳에서 배우는 아이들이 사회인이 되는 시점에 우리의 군중심리 수준은 지금보다 좀 나아지겠는가. 음모론에 덜 속고 의회는 견제와 균형에 가까워지겠는가. 아니면 ‘국민공회’의 운명을 타고난 민족처럼 영원히 심리적 단두대를 곁에 두고 살아갈 운명인가.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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