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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은 퇴근한 기업들 [김선걸 칼럼]

  • 김선걸
  • 기사입력:2025.05.18 21:00:00
  • 최종수정:2025-05-17 01: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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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대학은 나왔어?”

소학교(초등학교)만 졸업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은 임원회의 때 맘에 들지 않으면 이렇게 한마디 했다고 한다. 서울공대 출신이 즐비했던 임원진은 이 말만 나오면 바로 초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승승장구하던 핵심 임원을 어느 날 지방으로 발령 내 충격을 준 후 몇 달 뒤 다시 중책을 맡기기도 했다. 그러면 복귀한 당사자는 마치 회춘한 것처럼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공히 ‘정 씨 일가 중 최고 신임’받던 동생 정세영을 돌연 해외 지사로 발령 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임원들은 ‘정세영도 좌천당하는데 안심할 사람 없다’며 긴장해 일했다. 후일 정세영은 현대차 회장으로 돌아와 글로벌 기업을 키워냈다. 정 창업회장의 기상천외한 용병술은 후일담으로 회자된다.

현대그룹 창업사는 낙관과 도전의 스토리다. 당시 아시아 최장인 428㎞의 경부고속도로를 2년 5개월 만에 완공하고, 울산 바닷가 사진 한 장 들고 가서 조선 사업을 시작하고, 먹고 살 것도 없는 나라에서 자동차를 만들어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

지금으로 따지면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 같은 기업가였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하는 민간 우주선 발사와 로켓 재활용에 성공하고 전기차를 슈퍼카로 만드는 등 광적인 도전과 추진력으로 성과를 이뤄낸 사람들이다.

이런 신화적인 창업자들의 용인술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능력주의(meritocracy)’다. 정 창업회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현대건설 입사 10년도 안 돼 사장을 시켰다. 나이나 학력을 불문하고 능력만 봤기 때문이다. 머스크 역시 괴짜 엔지니어, 자퇴생, 고졸자도 능력만 따져 중용한다. 능력 있는 인재만 고르니 이들이 성공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요즘 기업인들을 자주 만나다 보니 한국 기업의 조직문화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듣는다.

최근 한 대기업 임원 얘기가 회자됐다. 해외에서 유력한 고객사가 찾아오는데 금요일 오후라서 미팅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어떤 기업은 직원이 아이디어를 냈더니 부장이 쓸데없는 일거리를 만들었다고 야단쳤다는 얘기, 칼퇴근과 휴가를 활용해 수십 가지 취미활동에 바쁜 대기업 직원의 얘기를 듣고 놀랐다. 그중엔 주가가 계속 하락하는 기업도 있다. 이렇게 일한다는 소문은 다 났을 것이다.

‘능력주의’는커녕 경영자부터 임직원이 너무 관료화된 것 아닌가. 여기엔 ‘주 52시간 근무제’를 필두로 한 제도 변화도 한몫을 했다.

은행, 공기업, 공무원뿐 아니라 이제 기업도 관료화가 심각해지고 있다.

현재 청년층(15~29세) 실업률은 7.3%다. 전체 실업률인 2.9%를 훌쩍 웃돈다. 열심히 일하고 싶은 청년이 많은데 일자리를 늘리려면 제도 개선 없인 불가능하다.

지난 2018년 테슬라의 모델3 생산이 지연됐다. 머스크는 즉시 공장 바닥에서 숙식을 하며 주당 120시간을 일했다. 스페이스X의 경우 직원들이 주당 80~100시간씩 일하다 보니 상당수의 퇴사 사유가 ‘수면 부족’이었다는 말도 나왔다. 이렇게 해도 100%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 공무원보다 더 관료적으로 일하면 성공을 기대할 수나 있을까.

과잉 노동을 하자는 말이 아니다. 심각한 ‘대기업병(病)’을 고쳐야 한다는 얘기다.

도전과 혁신이 사라진 자리엔 관료화가 똬리를 틀었다.

이끄는 사람이나 따라갈 사람이나 눈치만 본다.

노동 유연성과 리더십이 절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곧 ‘끓는 물 속의 개구리’가 될 것이다.

사진설명

[주간국장 kim.seonkeol@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0호 (2025.05.21~2025.05.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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