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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금지라는 확신과 다수의 침묵 [‘할말 안할말’…장지호의 ‘도발’]

  • 장지호 사이버한국외국어대 총장
  • 기사입력:2025.05.15 21:00:00
  • 최종수정:2025-05-15 13:4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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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몇 년째 교양 수업으로 ‘와인 앤 다인(Wine & Dine)’이라는 온라인 강의를 나름대로 인기리에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강의 콘텐츠를 수정해야 할 일이 생겼다. 포도 품종을 설명할 때 알코올 도수가 높고 무게감이 있는 카베르네 쇼비뇽을 근육질의 남성형이라고 비유했기 때문이다.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해 불편하다는 의견이다.

바야흐로 ‘PC(Political Correct ness·정치적 올바름)’ 세상이다. PC 뜻을 찾아보면 ‘인종과 성별, 종교, 성적 지향, 장애, 직업 등과 관련해 소수 약자에 대한 편견이 섞인 표현을 쓰지 말자는 정치적, 사회적 운동’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여기서 좀 더 나가면 사회 정의와 평등을 위해 ‘깨어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계도하고 변화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취지로 확장된다. 소위 ‘깨시민’과 무지한 나머지를 끊임없이 구별하며 도덕적 위계를 매긴다.

미국의 경우 PC가 특히 젠더 이슈에 광범위하게 제도화되었다. 성전환 남성 운동선수가 여성 리그에 참가해 상을 휩쓸거나, 남성의 신체를 유지한 트랜스젠더가 자신을 여성이라 주장하기만 하면 여성 전용 시설에 마음대로 출입한다. 이를 업주가 제지하면 차별적 행위로 몰려 거액의 소송을 당한다.

캘리포니아주는 미성년자의 성전환 수술 비용을 주 정부가 지원하는데, 학교는 자녀의 성 정체성을 부모에게 알릴 수 없다. 전통적인 가족상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도 법적으로 보장된다.

정부는 과학 기금 배분 기준으로 ‘다양성 지수’를 반영하여, 연구 성과가 아닌 과학자의 정체성이 연구 평가의 잣대가 된다.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과학 영역에도 PC는 어김없다.

그러는 사이 PC는 사회적 약자의 권리 증진이라는 취지를 살리기보다 특정 정치 진영이 다른 정파를 공격하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르네 피스터 저널리스트는 ‘잘못된 단어’에서 “이른바 포용의 언어는 저학력 폭도보다 우월해지는 수단이자 먹고살기 바빠 진보적 담론의 최신 흐름을 미처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수단이 되고 만다”고 비판한다.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우며 “나를 따르라”로 변모된 PC는 사회 분열과 정치 양극화의 주범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 복귀하게 된 원인으로도 과도한 PC에 대한 반발이 꼽힌다.

한국판 PC의 결정체가 차별금지법이다. 차별금지법은 ‘대한민국 헌법의 평등 이념에 따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생활 영역에서 합리적 이유가 없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뜻만 보면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아름다운 가치지만, 미국 사례를 보면 차별금지 파장이 어디까지 이를지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사회가 극단적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져 있다는 점에서 한국은 미국을 닮아가고 있다.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구호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다만, 단지 방법론적인 이의만 제기해도 하루아침에 무지한 극우로 몰린다. 많은 이들이 차별주의자라는 낙인이 두려워 차라리 입을 다문다. 소수의 큰 목소리에 다수는 침묵한다.

교황 선출 과정을 다룬 영화 콘클라베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확신입니다. 확신은 통합과 포용의 적입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차별금지라는 시대적 도그마에 맞서 혹시 있을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단순하게 몰상식과 불합리로 매도하는 사회 분위기라면 트럼프 당선에서 보듯이 역설적으로 반동의 극단이 득세할 수 있다. 침묵하는 다수가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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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호 사이버한국외국어대 총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9호 (2025.05.14~2025.05.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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