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28일 낮 12시 33분 이베리아반도에서 끔찍한 대정전(블랙아웃)이 발생했다. 유럽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정전으로 스페인·포르투갈과 프랑스 남서부의 6억2000만명이 대혼란에 빠져버렸다. 휴대폰·인터넷 등 전기를 사용하는 모든 기기가 꺼져버렸다. 병원·학교·은행이 마비됐고, 식당·상점도 문을 닫았다. 지하철·철도·공항이 멈춰 섰고, 도로의 신호등도 꺼져버렸다.
정부가 긴급 복구에 나선 덕분에 10시간 후에는 전력 공급이 복구됐다. 그러나 대정전으로 발생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손실은 돌이킬 수 없었다. 문명의 이기라는 '전기'에 꼼짝없이 예속돼버린 현대 인류의 냉혹한 현실이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대정전은 생각보다 자주 발생한다. 2003년 이탈리아·스위스 주민 5000만명이 12시간 동안 대정전에 시달렸고, 2006년에도 독일 북서부 지역에서 대정전이 발생했다. 작년에는 40도의 폭염에 시달리던 발칸반도에서 대정전이 발생했다. 올해도 이미 미국·영국·호주·칠레·인도네시아 등에서 대규모 정전이 발생했다. 우리도 2011년 대정전에 버금가는 '9·15 순환정전'을 겪었다.
대정전은 전기의 독특한 특성 때문에 발생한다. 전기는 휘발유·경유처럼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쓸 수가 없다. 전기는 생산한 즉시 실시간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그래서 모든 발전소와 전국 방방곡곡의 모든 소비자를 물리적으로 연결해주는 거미줄 같은 '송전망'이 꼭 필요하다. 소비자가 사용하지 못한 전기는 송전망을 떠돌다가 열에너지로 환경에 버려지게 된다.
대정전의 원인은 다양하다. 이론적으로는 전력 공급이 턱없이 부족해서 발생하는 과부하에 의한 대정전이 가장 흔하다. 그런데 발전소가 전기를 지나치게 많이 생산하더라도 대정전이 발생한다. 모든 발전소가 하나의 송전망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벼락·폭풍·산불·폭우와 같은 천재지변이나 송전선로·변전소에서 발생하는 사고로 일어나는 대정전도 있다. 이베리아반도 대정전의 원인은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송전선 연결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극심한 기온 변화에 의한 '대기 유도 진동'을 의심하는 전문가도 있다. 그러나 '친환경'을 유난히 강조하는 스페인의 유별난 '전력믹스'가 문제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스페인은 전체 전력의 59%인 19.5GW를 태양광으로 생산하고, 12%인 3.6GW를 풍력으로 생산하는 대표적인 '재생에너지 강국'이다. 자연환경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전 지구적 기후위기 대응에 앞장서겠다는 각오가 반영된 결과다. 태양광 시설이 집중된 지역에 갑자기 짙은 먹구름이 끼거나 비가 내리면 송전망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경제학·과학에서 반복적으로 확인했듯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태양광·풍력의 극심한 '간헐성'은 새로운 우려가 아니다. 우리가 2021년에 겪었던 요소수 대란도 사실은 중국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중국 동북부 지역의 바람이 갑자기 잦아들면서 풍력발전기가 멈춰 서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동안 속절없이 쏟아졌던 폭우로 석탄 생산에도 문제가 생겼다.
태양광·풍력이 언뜻 '친환경적'으로 보일 수는 있다. 햇빛과 바람은 누구에게나 '공짜'이고, 온실가스와 같은 오염물질도 배출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태양광·풍력이 친환경이라는 주장은 조심스러운 것이다. 실제로 태양광·풍력 설비의 생산은 물론 폐기 과정에서도 엄청난 오염이 발생한다. 폐설비의 폐기·재활용도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태양광·풍력에 대한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우리도 스페인·포르투갈 대정전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2015년 2.5GW였던 태양광 설비가 올해에는 27.4GW로 늘어났고, 2030년에는 55.7GW가 된다. 앞으로 5년 동안 매년 원전 5.7기에 해당하는 태양광 설비를 전국에 우후죽순으로 세운다는 뜻이다. 현재 전국에 운영 중인 태양광발전소가 무려 14만6077개나 된다. 대부분 전문성·책무성이 턱없이 부족한 영세 사업자가 운영한다. 그런 설비가 한 해 2만곳씩 늘어난다. 전국의 송전망을 관리하는 한전과 전력거래소의 업무가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송전망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도 감당하기 어렵다. 물론 송전망 건설을 위한 투자도 턱없이 부족하다. 강원도에 새로 건설해놓은 화력발전소는 가동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있다. 새로 설치한 태양광발전소의 절반 이상이 계통 접속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태양광·풍력이 미완성의 미래 기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극심한 간헐성에 대한 현실적인 대책이 없다. 호남·제주에 설치하겠다는 540㎿ 규모의 ESS에 무려 1조원이 넘는 사업비가 필요하다. 2023년 제주에 설치한 65㎿의 ESS에 2000억원이 들었고, 한전이 2024년 계통 안정화를 위해 설치한 ESS에도 무려 8300억원을 퍼부었다. 그뿐이 아니다. 20년의 수명을 다한 태양광·풍력 설비의 폐기·재활용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 선무당급 관료와 전문가의 책상에서 만들어지는 어설픈 대책은 의미가 없다. 자칫하면 우리도 대정전의 공포에 시달리게 될 수 있다. 확실한 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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