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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에 밉보여 사라졌던 천재 억만장자...‘부활’ 시나리오 다시 쓴다는데 [추동훈의 흥부전]

  • 추동훈
  • 기사입력:2025.05.14 16:53:01
  • 최종수정:2025-05-17 10: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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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토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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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104][프로토타입-06] 알리바바

선생님이 창업한 중국 최대 IT기업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뒤에는 늘 누군가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스승이라고 불리기도, 선각자라고 불리기도 하죠.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단어 ‘선생님’도 이러한 가르침을 주는 대표적인 분입니다.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었죠. 선생님 출신 중에 가장 위대한 창업자라고 하면 누가 있을까요. 오늘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중국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입니다. 한때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160센티미터 남짓의 작은 거인은 어떻게 중국을 대표하는 IT 거물이 됐을까요.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

항저우서 태어난 왜소한 소년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 서구권에선 ‘잭 마’라는 영어이름으로 더 유명합니다. 그는 1964년 9월 10일 저장성에 위치한 항저우에서 태어났습니다. 항저우는 중국에서도 가장 부유한 도시중 하나이면서 외국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큰 도시였습니다. 마윈은 왜소한 체구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키가 161cm로 알려져있는데 사실 그보다 더 작단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관심사는 언어였습니다.

소년 시절의 마윈
소년 시절의 마윈

특히 영어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어린시절부터 영어를 좋아했습니다. 당시 폐쇄적이던 중국 분위기 탓에 마윈은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좋은 기회가 오는데요. 그가 살았던 곳이 바로 시후라는 곳이 바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살던 곳 중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10대 시절 그는 외국인들과 어울리며 영어회화를 능숙하게 했습니다. 당시엔 유튜브도, 구글도 없었지만 그는 매일같이 영어를 외우고 외국인 친구를 사귀며 언어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한 호주인과의 우정이 바꾼 운명

그러던 1980년. 마윈은 호주에서 온 데이비드 몰리라는 외국인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마윈은 매일 40분씩 자전거를 타고 몰리 가족이 머무는 호텔로 가서 가이드를 자청했습니다. 워낙 친했던 탓에 몰리가 호주로 돌아간 뒤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갔습니다.그 사이 마윈은 성인이 됐는데요. 대학입시에 실패한뒤 취업을 준비했으나 작은 키때문에 호텔종업원, 경찰, 심지어 KFC 알바에서도 떨어지며 좌절했습니다. 삼수끝에 겨우 결원이 나서 입학한 대학이 바로 항저우 사범대였습니다. 영어를 워낙 잘했던 그는 하버드 대학으로 유학을 꿈꿨지만 그 역시 10번 지원해 전부 탈락했습니다.

마윈과 데이비드 몰리(오른쪽)
마윈과 데이비드 몰리(오른쪽)

그러던 그에게 결정적 사건이 21살에 일어납니다. 1985년 그는 몰리의 초대로 호주를 가게 됐는데요. 당시 중국은 여권을 발급받는 것도 쉽지 않은 시절이라 무려 7번 신청 끝에 비자를 받아 29일간 호주 뉴캐슬에 체류하며 넓은 세상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한달 남짓의 그 시간은 중국 항저우에 갇혀 있던 그의 생각을 크게 키우는데 큰 영향을 미칩니다. 마 회장은 “뉴캐슬에서 29일간 머무는 동안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창의적 시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교단에서 세계를 바라보다

마윈은 1988년 항저우 전자과학기술대학 영어 강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500여명의 졸업생중 대학강사로 임용된건 그가 유일했다고 하는데요. 10대 시절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그는 영어실력 하나로 가장 높은 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의 영어실력이나 비범함은 대학 강사를 하기엔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대학교 학장이 5년만 버텨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결국 그는 6년 반 동안 대학교 강사로 일했지만 가슴 속 꿈은 그보다 컸습니다. “더 큰 세상을 보고 싶다.”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

결국 그는 1992년 강사일을 하며 통역 회사 ‘하이보’를 창업했습니다. 일단 생계도 중요했기에 일을 하며 1995년까지 사업을 병행한 것이죠. 그는 항저우 10대 우수 교사에 선정될만큼 강의력도 좋았지만 그는 과감하게 창업을 택하며 강사직을 그만둡니다.

인터넷이란 마법을 만난 마윈

일을 그만둔 1995년 그는 미국으로 떠납니다. 바로 이 곳에서 ‘인터넷’을 처음 접합니다. 김범수 카카오 총수가 NHN이란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을 오가며 카카오톡을 창업한 것처럼, 그는 중국으로 돌아와 인터넷에 영감을 얻어 뚝닥뚝닥 1995년 인터넷 기업을 창업하는데요. 이름이 바로 ‘차이나옐로우페이지’, 중국 최초의 인터넷기업입니다. 이 회사는 2만7000위안의 자본금으로 설립됐구요. 홈페이지를 대신 만들어주는 회사였습니다. 다만 당시만해도 인터넷이 뭔지도 모를 시대. 다들 그를 사기꾼이라고 의심했습니다.

중국대륙을 삼킬 작은 거인, 알리바바

그의 큰 그릇을 받아주기엔 당시 중국은 너무나도 작았습니다. 사실 좋은 기회도 있었습니다. 야후의 창업멤버인 제리 양은 마윈의 비상함과 선견지명을 알아보고 스카웃에 나섰는데 그걸 마윈은 거절합니다. 자기가 꾼 꿈을 이루기 위해서인데요. 그는 1997년 중국의 인터넷 네트워크 구축 국정사업에 참여합니다. 중국 대외경제무역부서 온라인 서비스를 만드는 것을 주도하는데 참여한 것인데요. 하지만 중국 특성장 정부 주도 프로젝트는 월급도 짰고 그 성과도 다 정부가 가져갔습니다. 여기서 화가 난 마윈은 결국 1999년 자신을 따르던 18명의 멤버들과 함께 새로운 창업에 나섭습니다. 중소기업들을 위한 전자상거래 B2B 모델, 바로 알리바바의 탄생입니다. 참고로 인터넷 서점 서비스서 시작한 아마존이 모든 것을 파는 가게로 자리매김한 연도가 다름아닌 1999년입니다.

알리바바 그룹
알리바바 그룹

미래를 향한 주문 ‘열려라 참깨’

여기서 하나 궁금한 점. 왜 회사 이름이 알리바바일까요. 사실 현대·삼성과 같은 국내 대기업들의 고민은 해외에서 발음조차 어려운 사명입니다. 마윈도 창업에 나서며 이런 부분을 고민했습니다. 천일야화의 히트상품,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은 전세계적으로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당연히 발음도 쉬웠구요. 또 주인공 알리바바가 성품이 착하고 호감형이었다는 점에 착안해 그는 회사의 이름을 알리바바로 정합니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6분의 결단, 3000배의 수익

40인의 도둑이 아닌 18명의 창업멤버는 하루 17시간씩 일하며 서비스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1999년 3월 홈페이지가 완성됐습니다. 부푼 기대와 달리 현실은 절망적이었습니다. 빚을 내서 월급을 줘야할 정도로 서비스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데요. 문제는 마윈의 자존심이 너무 세서 투자도 제대로 못받았습니다. 수십차례 투자제안이 왔지만 마윈은 “우리회사 가치를 낮게보지 마라”며 번번이 거절했습니다. 그게 무려 38번이라고 합니다. 결국 첫 투자가 이뤄졌는데 바로 500만달러를 투자한 골드만 삭스였습니다.

마윈(오른쪽)과 손정의
마윈(오른쪽)과 손정의

그리고 2000년. 한 투자자가 6분만에 투자를 결정합니다. 20분간 마윈의 회사 발표가 예정됐는데 6분간 딱 듣더니 투자자는 2000만달러 투자를 결정합니다. 그 뒤 알리바바가 상장하며 투자금의 가치는 578억 달러가 돼 3000배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 투자자가 누구냐구요? 바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었습니다.

알리바바의 비상

2001년, 창업 1년만에 알리바바는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적자를 벗어났습니다. 그는 중국인 최초로 포브스 표지모델이 됐습니다. 그리고 2003년 C2C 서비스, 결제시스템인 알리페이까지 승승장구했구요. 2007년 홍콩 주식시장에 상장했고 2014년엔 뉴욕주식시장에 상장하며 억만장자가 됐습니다.

마윈과 그의 아내 장잉
마윈과 그의 아내 장잉

그리고 이러한 성공의 시발점이 됐던 친구가 있었죠. 마윈은 몰리와의 우정을 이어간 끝에 2017년에 뉴캐슬대학교에 230억원을 기부해 마·몰리 장학 프로그램을 설립했습니다. 당연히 뉴캐슬대학 최고 기부액이라고합니다. 그 1달간의 체류가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고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단 이유였습니다.

자유를 꿈꾼 마윈, 권력과 충돌하다

2018년 마윈은 갑작스레 성명을 발표했는데요. 2019년 9월, 이사회 의장직에서 사퇴하고 CEO직서 물러난다고 발표한 것입니다. 루머가 파다했는데 가장큰 논란은 중국 정부의 압박이었다라는 것. 알리바바는 알리페이를 필두로 앤트그룹이라는 금융부문 자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앤트그룹
앤트그룹

이게 바로 중국정부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인데요. 중국 금융 혁신은 결국 중국 정부가 주도해온 관 중심 금융정책에의 역행이었던 것입니다. 너무 잘나갔던 마윈 역시 정부 시스템을 비판했는데 결국 이게 발목을 잡은 것이죠. 해를 넘겨 2020년, 마윈은 앤트그룹을 상장하려했지만 정부의 반대로 IPO가 취소됩니다.

마윈
마윈

물론 앤트그룹의 금융사업이 위험하단 지적도 있었는데요. 이러한 갈등 이후 알리바바는 고강도의 조사를 받았구요. 마윈은 상당기간 대중에 나타나지 않으며 실종설이 제기되기도 했죠.

위기의 순간, 조용한 컴백

화려한 2000년대 초반을 열어제친 알리바바는 2020년대 최고위기를 맞이했는데요. 결국 앤트그룹 지분을 마윈은 포기합니다. 그리고 2022년 마윈의 소식은 일본에서 들려왔습니다. 일본 도쿄대학의 객원교수로 초빙된 것입니다. 2023년 부터 공개활동을 재개한 마윈은 2024년 4년만에 중국의 앤트그룹 20주년 기념행사에 등장해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2월에는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시진핑주석과 만나 재기의 기회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중국이 정부주도와 함께 민영기업 성장 계획을 같이 밝혔기 때문인데요. 과연 그의 재기가 가능할지도 큰 관심입니다.

내일을 버티는 사람

보잘것 없던 왜소했던 소년은 꿈을 꾸기 시작해 성공을 이룩했습니다.

마윈은 여러 강연에서 지금의 고생이 가져올 달콤한 성공을 강조했는데요.

“오늘은 혹독할 것입니다. 내일은 더 가혹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모레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일 밤에 포기해버리죠”

여러분의 모레도 머지 않았을 겁니다.

[흥부전]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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