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6.26 12:33:24
美 ‘힘에 의한 평화’에 놀란 유럽 나토서 ‘5% 방위비’에 온갖 꼼수 핵심 방위 의제 ‘우크라’ 사라지고 정상들, 트럼프 ‘환심’ 사기에 혈안 세계사에 기록될 희대의 외교 촌극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합니다.
25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채택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선언문을 보면 소름 끼치는 국제 정치의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광물협정을 요구한 미국 트럼프 행정부처럼 유럽은 우아한 위선을 벗고 정직한 야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향후 10년 안에 국내총생산(GDP)의 5%를 국방비에 쓰기로 약속했는데 그 지출 계산에 ‘우크라이나 기여’ 부분을 포함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강제할 조치들은 누락하고 있습니다.
또 합의된 성명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관련 언급은 없었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력히 규탄하는 대신 유럽-대서양 안보에 대한 장기적 위협(long- term threat)이라는 모호한 문구만 반영됐습니다.
불과 수개월 전 트럼프 백악관에서 수모를 당하고 쫓겨난 우크라이나를 지켜줄 것처럼 말했지만 6월 나토 정상회의에서 유럽 정상들은 “내 살길 바쁘다”는 노선을 확인시켰습니다.
더 강력해진 트럼프의 근육에 놀란 유럽 정상들의 외교적 촌극으로 기록될 ‘2025년 6월 헤이그’의 나토 정상회의를 소개합니다.
24일 네덜란드 국왕 주최 만찬 행사로 시작한 나토 정상회의는 핵심 참석자인 트럼프가 이스라엘-이란 휴전을 이끌고 ‘화려한 귀환’을 하는 자리라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힘에 의한 평화’를 직접 보여준 트럼프를 ‘영웅 서사’로 포장하려는 나토 유럽 정상들의 의도는 뜻밖에도 트럼프의 관종 성향 덕분에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헤이그로 향하는 에어포스원에서 나토 사무총장의 낯 뜨거운 찬사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공개한 것입니다.
관련 문자에서 마르크 뤼터 사무총장은 “참으로 비범한(truly extraordinary) 행동인 동시에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을 일입니다”, “당신은 지난 수십년간 어느 미국 대통령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달성할 것입니다”라고 추켜세웠습니다.
상대에게 호의를 전달하는 통상의 외교 문법을 넘어선 아부의 표현들입니다.
그가 이런 과잉 심기 의전 문자를 보낸 건 최근 캐나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처럼 트럼프가 이스라엘-이란 전쟁을 이유로 갑자기 불참 통보를 하거나 일정을 중간에 취소하고 백악관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걱정한 탓으로 보입니다.
정상회의 본행사를 앞두고 세상에 공개된 뤼터 사무총장의 아부 문자와 함께 스페인도 조명을 받았습니다.
나토 유럽 회원국 중 유일하게 스페인만이 미국이 요구하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5% 방위비 지출 약속을 못 맞추겠다며 이탈 선언을 한 것입니다.
외신들은 이로 인해 정상 간 조율 중인 합의문의 주어를 ‘우리’(We)가 아닌 ‘동맹들’(Allies)로 바뀌는 촌극이 벌어졌다고 보도했습니다.
합의문 주어를 모두에게 당사자 성격을 부여하는 ‘우리’로 쓸 수 없기에 ‘동맹들’이라는 꼼수를 부린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눈치 빠른 독자들은 진짜 문제가 스페인이 아닌 미국에 있다는 점을 간파할 것입니다. 미국도 다름 아닌 나토 회원국이기 때문입니다.
합의문 주어를 ‘우리’로 하게 되면 현재 국방비 지출이 3%대인 미국도 추가 지출 확대 부담이 발생합니다.
가뜩이나 급격한 국가부채 원리금 압박으로 국가 신용등급까지 강등당하며 방위비 확대 여력이 없는 미국이 회원국 전체를 포괄하는 ‘우리’라는 주어에 찬성할 리 없습니다.
사전 선언문 작성 과정에서 느닷없는 스페인의 이탈 뉴스는 “왜 5%라는 수치에 미국이 포함되어야 하는가”라는 트럼프의 격노를 피하기 위해 사전에 잘 조율된 나토 사무국과 유럽 회원국들의 외교 위장극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전쟁을 해결하고 개선장군처럼 헤이그에 입성한 트럼프. 그리고 그를 향해 바짝 엎드린 유럽 나토 회원국들에 대해 외교 전문 매체인 포린폴리시의 따가운 비판도 눈에 들어옵니다.
트럼프 입맛 맞추기에만 급급해 진짜 중요한 논의를 회피했다는 것입니다.
이 매체의 라비 아그라왈 편집장은 이번 정상회의가 키이우에 대한 추가 지원부터 우크라이나가 향후 어떻게 나토 동맹에 가입할지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 자리임에도 오로지 미국 대통령의 방문과 이에 따른 방위비 증액을 합의하는 자리가 됐다고 질타합니다.
진짜 중요한 의제는 포기하고 트럼프 심기 의전에만 집중한 나토 정상회의에 대해 그는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회의였나(Was a gathering worth the effort?)라고 반문합니다.
나토 유럽 정상들이 보여준 외교의 비루함에 더해 젤렌스키와 트럼프의 만남은 힘 없는 나라의 처연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2월 말 백악관에서 “당신은 가진 카드 패가 없다” “왜 정장을 입지 않느냐” “트럼프에게 존중과 감사를 표해라”라는 수모를 겪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정상 간 본회의 문턱도 제대로 밟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어렵게 트럼프 대통령과 50분간 회동할 수 있었습니다.
2월 백악관에서 왜 정장을 입지 않느냐는 질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 입겠다”고 답했던 우크라이나의 리더는 검은색 카고 바지와 티셔츠를 벗고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트럼프를 만났습니다.
전쟁을 마치고 정장을 입겠다던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뜻은 미국 일방주의 외교 의전에서 고려 사항이 아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트럼프 뿐일까요. 합의된 선언에서 우크라이나라는 단어는 단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틀의 여정에서 유럽 정상들은 사실상 “트럼프 최고”만을 외쳤습니다.
트럼프를 향해 웃음을 날리는 유럽 정상들, 그리고 한쪽 귀퉁이에서 굳은 표정의 우크라이나 정상 모습은 ‘트럼프 폭풍’ 속에서 각국이 어떤 자세로 생존을 모색 중인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