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영어교육 필요없는 거 아니에요? 인공지능(AI)이 통역도 번역도 다 해 준다던데요?"
요즘 학부모님들에게서 자주 듣는 질문이다. 절반은 맞다. 외국 나가서 스마트폰만 있어도 길을 찾고 메뉴를 주문할 수 있다. 거래에 필요한 기본 소통(basic communication)은 기계가 충분히 채워 준다. 그러나 영어를 단순한 회화·기능 도구로만 보면 본질을 놓친다. 세계를 읽고 해석하고 설득하는 언어는 여전히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의 근육으로 길러내야 한다.
전 세계에서 영어는 제2언어까지 15억명 이상이 쓰는 지구 공용어다. 국제 비즈니스, 과학, 외교, 인터넷의 거대한 층위가 영어 위에서 움직인다. 단순 소통을 넘어, 영어는 세계를 이해하고 정보를 해석하며 자신을 표현하는 핵심 인프라(core infrastructure)다.
AI 번역이 일상이 된 지금, 핵심은 융합(convergence)이다. 고급 영어 능력에 디지털 문해력(AI 사용·검증·편집 능력)이 결합될 때 실제 힘이 생긴다.
영어를 단순한 회화 도구로 축소하는 것은 '가난해지는 생각'이다. 같은 질문을 한국어와 영어로 AI에 던져보라. 결과의 깊이가 다르다. 학습 데이터의 중심축이 영어에 더 두텁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 영어는 방대한 지식의 인덱스이자 학술·기술 문서의 기본 포맷이다. 결국 영어로 묻고 읽고 쓰는 힘이 AI가 가진 지식의 폭과 깊이를 더 정밀하게 끌어내는 마스터키(master key)가 된다.
속도의 차이도 크다. 최신 연구, 산업 지침, 학회 공지, API 문서, 오픈소스 이슈 트래커, 투자자 서한은 대개 영어로 먼저 발표된다. 원문을 바로 읽는 사람은 하루 먼저 움직인다. 친절한 번역은 하루, 일주일, 때로는 한 계절까지 늦다. 이 시간차가 누구에겐 기회이고, 다른 이에겐 '진격의 거인'에 나올 법한 거대한 장벽이 된다.
그래서 '영어+AI'의 이중역량(dual competency)을 길러야 한다. AI로 먼저 빠르게 훑고, 사람이 근거를 확인한 뒤, 자기 문장으로 요약하는 루틴. 이 루틴을 반복할수록 학습자는 도구의 사용자가 아니라 설계자가 된다.
강남 대치동에서 24년간 가르치며 확인한 사실도 같다. 아이가 스스로 말하고 쓰고 싶어질 때 어휘는 제자리를 찾는다. 능동적 회상과 의미 부호화가 일어날 때 단어는 '시험용 정보'에서 '내 문장'으로 이주한다. AI·빅데이터·자동화 등 디지털 도구는 적극 활용하되, 모델이 내놓은 개요는 참고에 그치고 최종 문장을 평가·선택하는 권한은 학생에게 있어야 한다.
결국 관건은 재작성(paraphrasing) 능력이다. 같은 뜻도 문장 구조와 어휘, 길이를 바꿔 맥락에 맞게 다시 쓰는 힘. 번역 앱이 만든 문장을 그대로 제출하지 말고 상황에 맞게 덜고 보태는 연습. 좋은 질문을 붙들고 더 나은 답을 스스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자기 목소리가 생긴다.
AI 시대는 언어의 벽을 낮추지만, 아이러니하게 언어의 본질을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본질은 '정보를 옮기는 기술'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의미를 선택·배치해 타인의 인식과 행동에 작용하게 하는 능력이다. 같은 사실이어도 청자와 목적에 따라 단어의 온도, 문장 길이와 어순, 암시의 강도가 달라진다. 그 선택은 화자의 입장과 책임을 드러내고 관계를 조정한다. 기계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정보를 옮기는 것. 의미를 선택하고 책임을 지며 타인을 설득하는 일은 인간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이들에게 말한다. "여기까지는 도구가 도와줄 수 있어. 하지만 그다음 문장은 네가 스스로 작성해야 해." 느린 반복과 작은 수정이 쌓이면 어느 날 문장이 아이를 밀어주기 시작한다. 그때 비로소 세계와 나 사이에 견고한 다리가 놓인다. AI는 다리를 비춰준다. 그러나 그 다리를 건너게 하는 힘은, 영어를 변형하고 자유롭게 쓰는 능력에서 나온다. 어려워 보이지만 시작해보자. 한 문장씩, 한 질문씩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