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9.05 18:00:00
지질학적 저장 안전 한계 1460Gt 기존 추정치의 10분의 1에 불과 파리협정 목표 지키려면 연간 175배 확대 “탄소 통장은 세대가 함께 써야 할 예산”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탄소 저장 능력이 생각보다 훨씬 작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지금까지는 땅속에 저장할 수 있는 탄소의 양이 상당히 많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실제 가능한 양은 예상치의 10분의 1 밖에 안된다는 연구입니다. 인류는 지구를 위해 탄소 조절을 할 수 있을까요.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를 비롯한 국제 공동 연구진은 최근 국제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지질학적 탄소 저장의 신중한 행성 한계(A prudent planetary limit for geologic carbon storage)’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연구진은 지구 퇴적암층의 물리적 저장 잠재량을 약 1만 1800기가톤(Gt) CO₂로 추산했습니다. 그러나 지진 위험, 지하수 오염 가능성, 극지 보호, 해양 영유권 분쟁 등 현실적 제약을 모두 적용하자 실제로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는 양은 1460Gt CO₂로 급감했습니다. 기존에 흔히 언급되던 1만~4만Gt과 비교하면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치입니다.
이렇게 줄어든 용량을 연구진은 “세대가 함께 나눠 써야 하는 예산”에 비유합니다. 즉 지구의 탄소 저장 능력은 무한한 창고가 아니라 가계부의 통장 잔고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지금처럼 배출량을 줄이지 않고 무작정 저장에 의존한다면 통장 잔고는 빠르게 줄어들고 2200년 이전에 바닥날 수 있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현재 상황은 얼마나 심각할까요. 전 세계에서 실제로 땅속에 저장되는 이산화탄소는 연간 0.049Gt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파리협정 목표(지구온난화를 1.5~2℃로 제한)를 달성하려면 2050년까지 매년 8.7Gt CO₂를 저장해야 합니다. 이는 지금보다 175배 늘어난 수치로 전 세계 원유 산업 전체 규모에 맞먹는 인프라를 새로 만들어야 가능한 수준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 쓰는 ‘탄소 통장’의 지출 속도가 수백 배 빨라져야 한다는 뜻이지만 문제는 그 잔고가 한정돼 있다는 점입니다.
연구진은 또 지구가 가진 1460Gt CO₂의 저장 능력을 전부 ‘대기 중 탄소 제거(CDR)’에만 사용하더라도 지구 평균 기온을 최대 0.7℃ 낮추는 데 그친다고 설명했습니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금세기 말까지 지구 평균 기온은 3℃ 가까이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마저도 역전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결국 탄소 저장은 만능 카드가 아니라, 엄격하게 우선순위를 정해 사용해야 하는 한정된 자원인 셈입니다.
국가별 차이도 두드러집니다. 러시아,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등 기존 화석연료 생산 대국은 상대적으로 저장 잠재력이 넉넉합니다. 반면 인도, 유럽연합, 노르웨이 등은 보수적 제약을 적용하면 저장 가능량이 크게 줄어듭니다.
이 경우 저장 능력이 풍부한 신흥국과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이 부유국의 탄소를 대신 떠맡게 될 수 있습니다. 연구진은 이를 “세대 간, 국가 간 불평등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배출 책임이 큰 나라와 실제 저장 능력이 있는 나라 사이의 형평성 갈등이 불가피하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논란도 있습니다. 미국 텍사스대학의 지질학자 수잔 호보르카 교수는 네이처와 인터뷰에서 이번 연구가 위험을 과대평가했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는 “지진 위험이 있는 지역에서도 최신 공학 기술을 적용하면 안전한 저장이 가능하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연구진은 “위험을 고려해도 저장 능력은 유한하다”라면서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것과 대기 직접 제거를 위한 저장 공간 사용 중 어디에 얼마를 배분할지 국가 차원의 명확한 결정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번 연구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탄소 저장소는 무한 창고가 아닙니다. 인류는 제한된 ‘탄소 통장 잔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나중에 땅속에 넣으면 되지”라는 식으로 배출을 미루면 결국 미래 세대가 쓸 예산은 고갈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단기적이고 과감한 배출 감축 없이는 1460Gt이라는 지구의 ‘저장 예산’을 세대 간 공정하게 나눠 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번 연구는 기후위기 전략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하라는 경고로 보입니다. 한정된 저장 능력을 앞세대와 미래세대가 어떻게 나눠 쓸지, 지금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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