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4.11 20:39:02
40대 직장인 윤 모씨는 최근 가족들이 복용하는 영양제를 확 줄였다. 치솟는 물가에 지출 줄일 곳을 찾다 보니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건강기능식품이었다. 윤씨는 “온 가족이 몇 년간 매일 먹어온 비타민C와 오메가3를 빼고, 남편 챙겨 주던 비타민B 영양제와 홍삼도 끊기로 했다”면서 “부모님께 보내드리는 종합비타민과 연골 영양제는 차마 줄일 수 없어서, 딸이랑 먹던 콜라겐을 중단했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유난한 ‘건기식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 이 시장 큰손인 3050 여성들이 지갑을 닫고 있다. 온 가족 영양제를 구매하고, 명절이나 어버이날 선물로 건기식을 찾는 핵심 고객층이다. 고령층도 주요 고객인데, 건기식 시장이 온라인 위주인 데다 노인 맞춤형 제품군이 많지 않아 좀처럼 수요가 늘지 않는다. 건강에 관심이 많은 젊은층은 ‘해외 직구’로 눈을 돌렸고, 단백질 보충제 등 특정 제품군에만 몰린다.
지난해 건기식 시장 규모는 6조440억원으로 2019년 4조8936억원 대비 23.5% 증가했다. 하지만 최근 성장률을 보면 2021년 10%에서 2022년 8.1%, 2023년 -0.1%, 2024년 -1.6%로 꺾였다.
제약바이오 업계는 물론 식품, 화장품 기업들까지 뛰어들며 내수 시장이 빠르게 포화한 점도 발목을 잡았다. 건기식은 사실상 진입 장벽이 없는 데다 즉각적인 매출 창출도 용이하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의약품은 몇 년 단위로 효능과 안전성을 재입증해야 하고 개발에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된다”며 “반면 건기식은 다른 상품군 대비 마진율이 높고, 고객들이 꾸준히 복용하는 경우가 많아 여전히 매력적인 시장”이라고 전했다.
매년 600곳씩 사업자가 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기업이 시장 진출을 준비 중이다. 최근 압타바이오, 박셀바이오, 신신제약 등이 정관 변경을 통해 건기식을 사업목적에 추가했다. 이미 건기식 브랜드를 다수 보유한 신신제약은 제조·판매 등으로 건기식 사업을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KT&G 산하 KGC인삼공사의 정관장을 비롯해 CJ제일제당의 CJ웰케어, hy의 야쿠르트 및 쉼, 농심 라이필, 빙그레 tft 등도 건기식을 내놓고 있다. LG생활건강과 아모레퍼시픽 등 뷰티 업체들도 홍삼 브랜드는 기본으로 갖추고 있을 정도다.
삼양식품은 지난해 10월 말 오너 3세인 전병우 상무가 주도한 신사업으로 식물성 헬스케어 브랜드 잭앤펄스를 선보였다. 불닭볶음면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전략으로, 건기식과 간편식, 단백질 음료 등을 선보였다.
주얼리 기업 제이에스티나는 지난달 건기식·건강보조식품 개발·제조·판매업을 정관에 추가했다. 지난해 영업손실 26억원을 기록하는 등 실적 부진을 겪자 사업 다각화에 나선 것이다.
무한 경쟁은 한동안 이어질 전망이다.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제약부터 식품, 화장품까지 건기식에 도전하고 있는데 아직 절대 강자는 없는 상황”이라며 “우리가 팔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어디든 들어가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제약업계도 건기식 사업을 강화하며 시장 수성에 나섰다. 한독은 최근 건기식 사업 부문을 분할해 신설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신설법인을 통해 건기식 사업의 전문성을 강화해 시장을 넓힌다는 계획이다.
휴온스그룹도 건기식사업부를 오는 5월 자회사인 휴온스푸디언스에 흡수 합병시키기로 했다. 기존에 휴온스와 휴온스푸디언스로 분리됐던 건기식 사업을 휴온스푸디언스로 합치는 사업구조 개편으로 전문성과 경쟁력을 끌어올린다는 구상이다. 국내 대표 바이오기업인 셀트리온 역시 건기식 사업 진출을 저울질하고 있다. 올해 초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투자 대상으로 인삼과 홍삼 등 건기식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국내 시장이 포화된 단적인 증거는 ‘건기식의 황제’로 군림했던 홍삼 매출이 몇 년째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관장을 보유한 KT&G의 건강기능식품 사업부문은 지난해 매출액이 전년 대비 6.6% 감소한 1조3016억원, 영업이익은 17.7% 줄어든 964억원을 기록했다.
정관장은 국내 수요 감소를 해외 확장으로 메우려는 분위기다. 지난해 정관장의 미국 아마존 매출은 전년 대비 27% 늘었다. 미국 코스트코 매출도 9% 상승했다. 중국은 더 성장세가 가파르다. 티몰·징둥닷컴 등 온라인 플랫폼과 프리미엄 마트 올레, 창고형 마트 샘스클럽 등에도 입점해 있다. 정관장의 일반의약품 채널 매출 및 온라인 플랫폼 매출은 지난해 60% 넘게 성장했다. 정관장이 일본 드러그스토어에서 올린 매출액은 전년 대비 21%, 코스트코는 58% 상승했다.
CJ웰케어 역시 미국 아마존에 진출하는 등 해외 진출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마존에서 빠지고, 동남아시아 온라인몰 위주로 운영하는 등 해외 시장 확대에 난항을 겪고 있다. 지난해 CJ웰케어 매출은 700억원 전후이며 영업손실이 62억원으로, 3년 연속 적자다.
제약업계를 중심으로 개별인정형 원료를 통해 시장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개별인정형 원료는 건기식 공전에 등재되지 않은 신규 개발 원료로,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개별적으로 기능성을 인정한다. 개별인정형 원료로 인정받으면 6년간 해당 원료의 제조·판매권을 독점할 수 있다.
개별인정형 건기식의 신규 등재 건수는 2018~2021년 연간 20건 수준에서 2022~2024년엔 연간 40건으로 올라섰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제품의 차별화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자 새로운 건기식으로 소비자 수요를 잡기 위한 노력이라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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