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1.30 10:30:04
‘젖은 낙엽’의 시대
대잔류(Big Stay) 시대?
알 듯 말 듯 하다. 이런 때 비슷하게 떠올릴 법한 단어가 있다. ‘Great Resignation(대퇴사)’. 그렇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달라진 노동 트렌드를 반영한 단어다. 2021년 당시 기존 근로자들이 직장을 떠나 더 나은 기회를 찾으려는 현상을 뜻했다. 반면 대잔류는 경제적 불확실성과 안정 추구 욕구로 인해 현재의 직장과 생활 방식을 유지하려는 현상을 뜻한다. 냉온탕처럼 불과 2~3년 사이에 우르르 퇴사 행렬하던 유행이 ‘젖은 낙엽처럼 회사에 붙어 있겠다’ 주의로 바뀐 셈이다. 미국에서 시작한 확연히 달라진 인사(HR) 트렌드다. 이는 새해 국내 노동 시장에도 자리 잡을 것이란 분석이 잇따른다.
대잔류 시대 부각 왜?
美 빅테크 구조조정에 ‘깜짝이야’
용어의 발상지는 미국이다.
팬데믹 시기 노동 시장은 기술 발전, 원격 근무 확산과 같은 변화로 기업 간 ‘인재 모셔가기’ 열풍이 불었다. 특히 고연봉 노동자 입장에선 골라가며 회사를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선택지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바짝 벌고 은퇴하자’ ‘좀 더 조건 좋은 곳으로 가자’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됐다. 더불어 젊은 직원 중심으로 ‘워라밸’ 중시 문화도 확산됐다. 이른바 ‘대퇴사’ 시대 배경이다.
하지만 상황은 얼마 안 가 180도 바뀌었다. 최근 경기 둔화 우려와 각 기업의 채용 축소 여파는 노동자에게 새로운 직장을 찾는 것보다 현재 직장을 유지하는 게 더 안전하다는 신호를 줬다. 높은 인플레이션, 금리 인상, 주식 시장의 변동성 등도 각 노동자의 의사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인상은 주택 담보대출과 신용대출 금리를 올리면서 즉 ‘꼭 내야 할 돈’이 많아졌다. 이에 따라 많은 이가 주택 구매나 이사 같은 큰 결정을 미루고 현재의 주거지와 직장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2023년 맥킨지와 딜로이트의 ‘Big Stay(대잔류)’ 관련 설문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근로자의 60% 이상이 “현재 직장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응답했다. 경제적 안정성(45%), 팀·동료와의 관계(30%) 등이 주요 이유로 꼽혔다. 딜로이트의 ‘글로벌 MZ세대 보고서(2023년 5월)’에서도 “새로운 직장을 찾기보다는 현재의 직장에서 직무 만족도를 높이고 싶다”는 응답이 70%에 달한다고 밝혔다. 특히 응답자 중 50%는 경기 침체 우려가 주요 요인이라고 답했다.
이런 분위기는 단순히 노동 시장뿐 아니라 주거지 선택, 소비 습관, 생활 방식 등에도 반영되고 있다.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미국 내 주거 이동률은 9%로 1970년대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한마디로 이사를 덜 간다는 말이다. 이는 높은 주택대출 금리와 함께,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할 경우 발생할 추가 비용 부담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컨설팅 업체 PwC는 “빅스테이(Big Stay)가 소비 습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많은 소비자가 해외여행이나 고가의 사치 소비를 줄이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활동에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한다”고 분석했다. 홈 엔터테인먼트, 가구, 주방용품 판매 증가가 대표적인 예다.
한국에도 “대잔류 트렌드 온다”
기업 49%는 “올해 긴축 경영”
미국에서 시작된 대잔류(Big Stay) 트렌드는 글로벌 경제와 노동 시장 전반에 걸쳐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런 변화가 한국 노동 시장에도 영향을 끼칠까.
인사조직 전문 컨설팅 기업 네모파트너즈POC는 최근 ‘2025년 HR 인사이트’라는 보고서에서 한국에서도 “대잔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네모파트너즈POC가 대잔류 시대를 전망한 이유는 미국의 구조적 변화와 유사한 양상이 한국에서도 펼쳐지고 있어서다.
최근 한국 역시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이 커진 여파를 여실히 맞고 있다. 대·중견·중소기업 할 것 없이 긴축 경영을 확대하는 기업이 많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조사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절반에 가까운 49.7%가 새해 경영 기조를 ‘긴축 경영’으로 설정했다고 답했다. 삼성전자와 SK그룹 등 대기업이 비주력 사업을 정리하고 조직 효율화를 단행하는 등 대기업의 61%가 긴축 경영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실제로 업종을 불문하고 국내 굴지 대기업들이 ‘몸집 줄이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미 4대 그룹을 중심으로 조직 개편을 통한 슬림화, 사업 매각, 희망퇴직 등이 시행됐다.
삼성전자는 호주와 싱가포르 등의 자회사 영업·마케팅 직원 15%와 행정 직원 30%가량을 감축할 방침이다. 이미 인도와 남미 일부 법인에서 10% 수준의 감원 작업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LG디스플레이는 액정표시장치(LCD)를 생산하는 중국 광저우 공장을 중국 차이나스타(CSOT)에 매각했고, 2019년 이후 5년 만에 사무직 희망퇴직을 시행하고 있다. 앞서 지난해 6월에는 생산직 희망퇴직을 접수했다.
SK, 롯데, 신세계그룹 등도 사업 매각, 임원 교체, 승진 최소화 등을 통한 사업 리밸런싱(구조조정)에 나서는 상황이다. KT는 현장직 희망퇴직을 진행해 전체 인력의 6분의 1에 달하는 2800명이 회사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근로자 입장에서는 새 직장을 구할 길도 확 좁아졌다.
HR테크 기업 인크루트가 조사한 지난해 하반기 채용 동향에 따르면 대기업 103곳 중 채용을 확정한 곳은 35%다. 지난해보다 43.8%포인트나 감소했고 2014년 이후 실시한 채용 동향 조사 중 최저치다. 중견기업과 중소기업 하반기 채용도 줄었다. 중견기업 117곳 중 채용을 확정한 곳은 50.4%로 지난해 대비 4%포인트 감소했다. 중소기업 588곳 중에서도 채용을 확정한 곳은 전년보다 10.6% 줄어든 47.4%에 그쳤다. 채용 시장이 축소돼 어쩔 수 없이 대잔류를 택하게 되는 인원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기업 채용 문이 좁아지다 보니 지난해 취업자 수 증가폭은 전년 대비 반 토막 수준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고용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취업자 수는 15만9000명 증가했는데, 이는 전년 증가폭인 32만7000명 대비 절반 이상 감소한 수치다. 권능오 율탑노무사사무소 노무사는 “국내 경제 상황이 불안정할수록 사람들은 안정적인 수입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며 “이에 따라 새로운 직장을 탐색하거나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현재의 직장에서 머무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아졌다”고 들려줬다.
[박수호·정다운·조동현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94호 (2025.01.22~2025.02.0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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