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6.20 17:14:11
제주의 숨은 해변과 오름 다랑쉬오름에 올라 아끈다랑쉬를 바라보다 사람 없는 신흥해변과 코난비치 일몰 바라보며 먹는 회 한 점, 조천수산
제주의 여름은 바다에서 시작되고 또 완성된다. 신흥해수욕장의 조용한 품, 코난비치의 맑은 수영장 같은 바다, 태웃개의 차가운 용천수, 섶섬을 마주한 구두미포구의 수중 산책, 고내포구의 낭만적인 일몰까지. 아이와 함께, 혹은 혼자 가도 좋은 바닷가 다섯 곳을 소개한다.
제주도에 왔다. 최근 한두 달 정신 없이 바빴다. ‘제주도에 가서 바람이나 쐬고 오자’라는 생각에 한 달 전 일찌감치 숙소와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숙소와 숙소 주변에서만 빈둥거릴 작정으로 렌터카도 빌리지 않았다. 하지만 출발일이 다가오면서 뭔가 여행작가의 고질병이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렵게 시간을 내 제주도에 가는데 칼럼 한 꼭지는 만들어 와야 하는 거 아닌가?’ 결국 출발 전날 렌터카를 예약했다.
제주국제공항을 빠져나오면 야자수 몇 그루가 서 있다. 건들거리는 야자수는 꼭 이렇게만 말하는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놀아도 돼. 바다는 생각하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지.’ 하지만 나는 여행작가니까 놀기에 앞서 일도 고려하게 된다.
제주도에 오기 전, 이왕 한 꼭지를 만들어야 한다면 뭐가 좋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관광객은 모르는 제주의 숨은 해변’을 취재하기로 했다. 협재나 표선, 중문, 우도 하고수동 등 관광객들이 가는 제주의 해변 말고 제주 현지인들이 가는 ‘바닷가’를 소개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고른 곳이 신흥해수욕장, 코난비치, 태웃개, 구두미포구다. 이 코스라면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조용한 힐링의 공간, 신흥해수욕장
신흥해수욕장은 제주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다. 제주공항에서도 가깝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함덕해수욕장에서 자동차로 약 5분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제주 올레길 19코스와 인접해 있어 도보 여행자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신흥해수욕장의 가장 큰 장점은 조용하고 아담한 분위기다. 한눈에 다 들어오는 해변은 ‘나만의 해변’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가족 단위 여행객들에게 특히 추천할 만한데, 수심이 얕고 물살이 잔잔해 어린이들이 물놀이하기에 적합하다. 바닷물도 정말 맑아서 해변에 서 있어도 바다 바닥이 훤히 보인다. 모래사장도 푹신해 아이들도 마음 놓고 놀 수 있다. 해변을 걷다 보면 작은 게나 고동 등을 쉽게 볼 수 있어 자연 체험에도 좋다.
신흥해수욕장은 성수기에도 비교적 혼잡하지 않다. 주변에는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돌벽으로 지어진 탈의실과 샤워 시설도 있다. 해변에서는 멀리 서우봉도 보인다. 조용하고 프라이빗한 해변을 찾는 여행자라면 꼭 한 번 가볼 만하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현무암이 어우러진 숨은 천연 풀장, 코난비치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 위치한 코난비치는 제주 동쪽 해안의 ‘숨은 보석 같은 해변’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곳이다. 용암이 흘러 형성된 현무암 바위들이 바다를 감싸며 만들어낸 자연적인 풀장이라고 보면 된다. 썰물 때면 얕은 수심과 고운 모랫바닥이 드러나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즐기기에 좋다.
공식 해수욕장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관광객이 적고 조용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바닷물도 맑아 스노클링을 하며 다양한 해양 생물을 관찰할 수 있다. 특히 노지 캠핑을 즐기는 이들이 오션뷰를 감상하며 미니멀한 캠핑을 즐길 수 있어 좋아한다. 해변 근처에는 간이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인근에는 카페와 식당도 있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해변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에 방문 전 물때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용천수와 바닷물이 만나는 곳, 태웃개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에 있는 태웃개. 이곳은 제주 현지인들이 찾는 숨은 해변이다. ‘태우(떼배)를 매어두던 포구’라는 뜻을 가진 곳으로 종정포구라고도 불린다. 해변에 있다 보면 도보 여행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곳이 제주 올레 5코스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태웃개의 특징은 용천수와 바닷물이 만나는 지역이라는 것. 그래서 물에 염도가 낮고 수온이 낮아 여름철에 현지인들이 즐겨 찾아 더위를 식힌다.
탁 트인 바다와 검은 현무암이 어우러져 제주다운 풍광을 빚어낸다. 스노클링을 즐기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바닥에 돌이 많으니 해수욕 시에는 아쿠아슈즈를 꼭 착용하기를 권한다.
주차는 7~8대 정도 가능하며 공용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다. 샤워시설은 없지만 현지인들은 지하 암반에서 흘러나오는 용천수를 이용해 바닷물의 짠기를 헹군다. 자연 속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섶섬을 바라보며 즐기는 스노클링, 구두미포구
구두미포구는 제주 서귀포시 보목동에 위치한다. 보목은 자리회로도 유명한 곳이다. 모슬포에서 잡은 것보다 살이 연해 물회보다는 회로 먹는다. 구두미포구에 도착하면 조그만 푸드 트럭이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주로 떡볶이와 어묵 등을 판다. 산책을 나온 현지인들이나 여행객들이 이를 안주 삼아 제주막걸리를 마시는 걸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돌담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지금도 소형 보트들이 정박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포구로 남아 있다.
포구에 서면 섶섬(섭섬)이 보인다. ‘섭’은 제주어로 ‘풀’ 또는 ‘숲’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풀로 덮인 섬’이라는 뜻이다. 천연기념물 제421호로 ‘제주도 남방큰돌고래 서식지’로도 유명하다. 물론 입도는 금지되어 있다. 그만큼 주변의 산호초와 해조류가 잘 발달되어 있어 스노클링과 다이빙 마니아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자연 수족관이라 불리기도 한다.
구두미포구 역시 가장 큰 매력은 맑고 투명한 바닷물과 다양한 해양 생물이다. 스노클링을 하다 보면 뿔소라와 보말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주변에는 주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애월에 자리한 세련된 풍경의 해변, 고내포구
고내포구는 애월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지나게 되는 애월읍의 작은 포구로, 일몰 명소로도 유명하다. 고내포구의 장점은 제주 바다의 고요함과 전통 어촌의 정취를 동시에 만날 수 있다는 것. 제주올레 15-B코스와 16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고내포구가 처음 만들어진 때는 고려 원종 11년(1270년경)경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현대식 방파제가 만들어진 것은 1960년대다. 고내포구의 별칭은 ‘요강터’다. 포구 앞바다의 지형이 요강처럼 움푹 파여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포구 앞에 서면 어선 몇 척이 한가롭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옛 어촌의 아늑한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어우러진 고내포구의 풍경은 남유럽의 어느 해안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포구 주변에는 ‘포세이돈의 얼굴’이라 불리는 바위 절벽이 있어 방문객들의 눈길을 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제주 바다의 아름다움에 반해 돌아가지 못하고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을 담고 있는데, (제주 바다에 그리스 로마 신화라니)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인근에는 다양한 카페와 식당이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가장 제주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 오름
누군가 가장 제주다운 풍광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주저 없이 오름이라고 말하겠다. 어느 훗날 제주에 살게 된다면 오름이 보이는 곳에 살고 싶은 생각도 간절하다. 지금까지 제주를 서른 번 가까이 찾으면서, 부끄럽지만 한라산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까운 세월 내에 꼭 가보리라 다짐하고 있다. 더 나이가 들면 못 갈 것 같아서다. 그래도 오름은 꼭 간다. 20~30분만 발품을 팔면 바닷가에서 보는 제주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름은 ‘오르다’의 명사형인데 기생화산을 뜻하는 제주 사투리다. 제주 설화는 ‘설문대할망’이 오름을 빚었다고 전한다. 설문대할망은 육지와 왕래하기를 열망했던 제주 사람들에게 속옷 한 벌만 만들어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속옷 한 벌을 만드는 데는 명주 100동이 필요했는데 제주 사람들은 99동밖에 모으지 않았다. 마지막 1동을 모으는 사이에 설문대할망은 치마폭에 흙을 담아 다리를 놓는 작업을 했는데 이때 흘러내린 흙덩이가 오름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오름은 제주 동쪽 들녘에 많다. 높은오름, 돛오름,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채오름, 거문오름, 샘이오름, 윗밤오름, 알밤오름, 용눈이오름 등 수없이 많은 오름들이 흩어져 있다. 차를 타고 가다 보이는, 평지에 불쑥 솟아오른 것들은 다 오름이다. 오름과 오름 사이에 길이 있고 밭이 있다. 오름 위에는 말과 소가 풀을 뜯는 목장이 있고, 산담을 두른 무덤이 있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오름에서 왔다가 오름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제일 좋아하는 오름은 다랑쉬오름이다. 다랑쉬라는 이름은 산봉우리의 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 하여 얻었다. 동쪽으로 뜨는 달이 좋아서일까, 일명 월랑봉(月郞峰)이라고도 하는데, 매끈한 곡선과 가지런한 외형으로 ‘오름의 여왕’으로도 불린다. 다랑쉬오름은 382미터로 꽤 높은 오름에 속한다. 등산로 입구에서 정상까지는 가파른 풀밭을 지그재그로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20~30여 분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인다. 북서쪽으로 비자림과 돋오름, 남동쪽으로 용눈이오름, 중산간의 풍력발전소 등이 잘 보인다. 멀리 제주의 북쪽과 동쪽 해안까지 아스라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발 아래로는 커다란 분화구가 까마득히 내려다보인다. 분화구는 산의 외형과는 반대로 깔대기 모양으로 움푹 패어 있는데, 다랑쉬오름의 분화구 깊이는 백록담과 같은 115미터, 바닥은 지름 30미터 정도 된다고 한다.
제주 사람 생의 전체를 함께 해온 오름
다랑쉬오름 옆으로 아끈다랑쉬가 있다. 둘째라는 뜻의 제주말인 ‘아끈’을 붙인 아끈다랑쉬는 다랑쉬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아끈다랑쉬는 둘레 약 600미터, 깊이 10미터 정도의 분화구를 숨기고 있다.
오름에 올라보면 오름이 단순한 흙덩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은 오름 자락에서 생을 일구었다. 불을 놓아 화전을 만들었고 말과 소를 쳤다. 사냥도 오름 자락에서 이루어졌다. 오름은 산 사람뿐만 아니라 죽은 이들의 몸도 넉넉하게 받아주었다. 제주 사람들은 죽어 오름에 뼈를 묻었고 제주의 맑은 햇빛과 세찬 바람 속에 누웠다. 오름자락마다 산담을 두른 무덤들이 가득하다.
다행히 날씨가 좋다. 다른 오름들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예전에 나는 인생이 하나의 봉우리에 오르기 위해 여러 사람과 다투고 경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인생은 각자의 봉우리를 만들어 가며 거기에 묵묵히 올라가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올라간 각자의 봉우리에서 서로를 향해 빙긋이 웃어주는 거지. ‘거긴 어때요? 여긴 좋아요’ 하면서. 인생은 다른 이의 삶을 부러워한다고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행복은 자신의 삶 속에서 찾는 것이다.
노을이 지고 있고 멀리 한라산 정상도 보인다. “아, 좋다” 하고 소리 내 말해본다. 뭔가가 좋을 때는 소리 내 좋다고 말하면 더 좋아진다. 제주 역시 그 전보다 훨씬 더 좋아지는 기분이다.
표선면에 자리한 ‘어촌식당’의 자리물회와 옥돔국을 드셔보시길. 자리물회는 된장을 풀어 제주식으로 만든다. 무를 가득 썰어 넣고 끓인 옥돔국은 오직 제주에서만 먹을 수 있다. 식당에는 ‘낚시로 잡은 옥돔이라 간혹 낚시바늘이 나올 수 있으니 놀라지 마세요’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 있다.
‘대동강초계탕’은 새터민이 운영하는 평양냉면집으로, 제주에서 맛볼 수 있는 제대로 된 평양냉면이다. 성읍마을에 자리한 ‘섬이라니 좋잖아요’는 여행작가 김민수 씨가 운영하는 민박집이다. 옛날 제주 돌집을 숙소로 꾸몄다. 침구 등이 호텔 수준이며 고양이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여행작가 사장님께 주변 여행지와 맛집에 관한 정보도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 ‘조천수산’은 회를 직접 떠 바닷가 포구에서 먹을 수 있는 곳. 아름다운 일몰을 보며 먹는 회 맛이 기막히게 좋다.
[글과사진 최갑수(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84호(25.06.17)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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