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6.17 08:14:04
연극열전 연극 ‘킬 미 나우’ 장애인 아들 둔 아버지 이야기 8월17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엄마 뱃속을 헤엄쳤던 기억 때문일까. 물에 잠긴 인간의 모습은 평안한 느낌을 준다. 원초적이면서 조금은 무기력한 모습, 양수 속의 태아 혹은 이제 막 태어나 아직 피부가 마르지 않은 아기와 같은 이미지다.
연극 ‘킬 미 나우’(연출 오경택)는 주인공이 욕조에 잠겨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무대 뒤편 샤워실의 커튼이 걷히면 촉망받는 소설가였던 제이크(이석준·배수빈)가 사지를 가누기 힘든 열일곱살 지체장애인 아들 조이(최석진·김시유·이석준)를 목욕시키고 있다.
첫 장면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생존을 의지하고, 그 다른 한 명은 전심전력으로 상대를 돌본다. 몸은 커졌어도 아버지에게 아들은 탄생했을 때의 순간처럼 늘 아기다.
여동생 트와일라(이진희, 김지혜), 도우미 라우디(허영손, 곽다인)가 도움을 주지만 제이크의 생활은 돌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조이를 신경쓰느라 소설 쓰기를 포기한 지도 오래다. 유일한 해방구는 일주일에 한번 애인 로빈(전익령, 이지현)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그는 말한다. “나한텐 심각한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어. 나한테 ‘나’는 없어.”
‘킬 미 나우’는 감정의 진폭이 큰 작품이다. 인물들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도 암울한 현실에 좌절하고, 불가피하게 존엄성을 잃는 순간에는 비참한 분위기가 공연장을 감싼다. 배우들은 일순간 무대의 공기를 바꾸는 깊이 있는 연기로 극을 입체적으로 전개시킨다.
이들의 일상은 제이크가 퇴행성 불치병에 걸리며 위기를 맞는다. 제이크는 점차 조이처럼 말이 어눌해지고 목발과 휠체어 없이 거동을 할 수 없게 된다. 통증을 견디기 위해 먹는 약은 인지 능력을 떨어뜨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킬 미 나우’는 마지막 장면 역시 욕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첫 장면과 반대로 제이크는 욕조 안에, 조이는 밖에 앉아 서로의 손을 잡고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갓난 아이 때부터 17년간 씻겼던 그 장소에서 위치만 뒤바뀐 채 함께 있다.
배우가 빈 욕조에서 물이 있는 것처럼 연기했던 앞선 장면들과 달리 마지막 장면에서는 욕조에 실제로 물이 채워져있다. 위치도 무대 뒤편에서 앞쪽 중앙으로 옮겨져 관객들은 제이크 역 배우가 물에 잠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엄마 뱃속에서 웅크린 태아처럼 원초적이고 평안한 모습이다.
연극을 보고 나면 장애를 가진 아들 때문에 “‘나’는 없다”고 한 제이크의 말이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엄마와 아빠도 태어난다” “태어나는 모든 아이는 완벽한 존재다”라는 그의 소설 속 문장처럼 그는 조이의 탄생과 함께 새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백조가 되지 않더라도, 나는 이 오리를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라는 문장처럼 그 모든 어려움에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8월17일까지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