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3.15 06:43:38
반도체 초격차 / 마르크 헤잉크 지음 / 김장열 번역감수 / 이든하우스 펴냄 ASML의 성공비결 분석 극자외선 노광장비 유일 생산 한 대당 가격 5천억원 달해도 삼성전자 등 전세계서 러브콜 기술혁신 비결은 과감한 M&A 경쟁국 獨·佛 등과도 기술연대
네덜란드를 먹여 살리는 첨단 기업이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 ‘슈퍼을’로 불리는 ASML이다. 이 기업은 단 하나의 제품만을 만든다. 지구촌에서 가장 복잡하고 민감한 기계로 통하는 리소그래피(노광) 기계다.
이층 버스 크기인 이 장비를 칩 공장으로 운반하려면 보잉747 7대가 필요하다. 대당 가격이 무려 2500억원에 달한다. 그런데도 삼성전자와 대만 TSMC 등이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한다. 차세대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는 5000억원에 달하는데 이를 공급받기 위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네덜란드 출장을 떠났을 정도다.
ASML은 노광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7㎚(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하 미세 공정에 필요한 극자외선 노광 장비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한다. 이 장비 없이는 최신 반도체 생산은 꿈도 못 꾼다.
이달의 경제경영서로 선정한 ‘반도체 초격차’는 40여 년 전 네덜란드 시골 마을에서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이제는 독점 기업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ASML의 눈부신 성장사와 성공 비결을 깊이 있게 파헤친다.
저자인 마르크 헤잉크는 네덜란드 일간지 NRC에서 반도체 산업을 10년 이상 취재한 기자다. 그의 발품과 손끝에서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던 기업의 내부가 생생하게 공개된다. 공동 최고경영자(CEO)인 페테르 베닝크와 마르틴 판덴브링크를 비롯한 고위급 임원들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취재한 결과다.
반도체에서 노광 공정이란 웨이퍼 위에 빛으로 회로를 새기는 공정을 뜻한다. 기계가 투사할 수 있는 빛이 미세할수록 하나의 표면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칩의 작은 전기 스위치)를 넣을 수 있다. 트랜지스터가 많을수록 칩은 더 빠르고 더 효율적이고 더 강력해진다.
ASML은 파장이 짧은 극자외선을 사용하는데 지구에서 극자외선을 생성하려면 매우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 거의 모든 물질에 흡수되고, 심지어 공기 중에도 흡수된다. 따라서 렌즈 대신 거울이 필요하고, 기계는 진공 상태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초정밀 광학과 레이저, 메커트로닉스, 소프트웨어 등 다양한 첨단 기술이 융합된 복잡한 시스템인 셈이다.
이 절대적 기술 우위를 이루기 위해 ASML이 택한 것은 과감한 인수·합병(M&A)과 아웃소싱의 정신이다. ASML은 노광 장비를 조립만 할 뿐이고 부품은 70여 개 공급업체에서 30만개를 제공받는다. 더 잘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에게 맡긴다. 순도 높은 거울과 렌즈를 제공하는 독일 자이스가 대표적이다. 스위스와 프랑스, 독일 등 라인강 국가들과 연대한 장인정신도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수직적으로 통합된 니콘과 캐논 등 일본 경쟁 업체들과 다른 점이다.
초고가 기계를 납품했다고 끝은 아니다. ASML의 전략은 ‘납품 먼저, 개선은 나중에’로 요약할 수 있다. 일단 공장에 기계를 납품한 다음 그 기계의 불완전성을 파악하고 제거해나가는 방식이다. 일본 업체들이 카메라처럼 완벽히 조율된 상태로 ‘플러그만 꽂으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과 다르다. 장점은 시간을 아껴준다는 것. 환경에 맞춰 장치를 미세 조정하면서 제조업체들이 자체 테스트를 훨씬 더 빨리 시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직설적이고 다혈질인 네덜란드인들이 모인 만큼 기업 문화는 수평적이다. 엔지니어들은 서로 끊임없이 도전하고, 직급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말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ASML 한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심지어 당신이 회장이라 해도 만약 당신이 완전히 틀린 결정을 내린다면, 누군가가 반드시 그에 대해 지적할 겁니다.”
ASML은 1995년 미국 나스닥과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만약 이때 ASML 주식에 1달러를 투자하고 2024년까지 보유했다면 배당금을 포함해 600배 이상의 수익을 거두었을 것이다. 이 기업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단 하나 미·중 기술전쟁이다. 그럼에도 반도체 초격차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더 빨리 달릴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