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는 인류 역사 최초의 글로벌 네트워크였다. 기원전 2세기 한나라와 로마제국의 교역 루트로 시작돼 16세기 해상무역이 본격화되기 이전까지 동서양 간 문명 교류와 세계 무역의 중심이었다. 그 비단길의 한가운데 위치한 중앙아시아는 단순히 문물 전달의 통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를 융합하는 중개지로서 번성했다.
실크로드의 흥망성쇠와 함께 '잊힌 비단길'이 됐던 중앙아시아의 전략적 가치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한국과 중앙아시아는 특히 과거부터 연이 깊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전역에 30만명에 이르는 고려인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을 이해하려면 그 땅에 사는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던가. 그래서 이번 중앙아시아 출장에서 특히 만나고 싶었던 이들이 바로 고려인 기업가들이었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역사는 1937년 옛 소련 정부에 의해 강제 이주된 17만명의 한민족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절박한 생존의 위기 속에서도 황무지를 개척하고 집단농장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끈질기게 낯선 땅에 뿌리를 내렸다.
몇 년 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 "고려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없었을 것"이라고 칭송했을 정도로, 현재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은 각 나라의 '모범 소수민족'으로 자리를 빛내고 있다. 이들은 한국 비즈니스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우리 기업이 새로운 실크로드를 여는 가교 역할도 하고 있다.
좋은 예로 작년 카자흐스탄에 1호점을 낸 편의점 CU의 현지 파트너는 중앙아시아 최대 아이스크림 제조사이자 고려인 2세 기업이다. 양사는 긴밀한 협력을 통해 향후 5년간 카자흐스탄에 CU를 500호점까지 확장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제조업 기반이 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의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해 우리와 상호 보완적인 경제 구조를 지닐 뿐 아니라 한류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가 많아 소비재 수출이 유망하다. 아울러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역내 무관세의 이점을 활용해 러시아 등 독립국가연합(CIS) 메가 시장으로의 수출 확장성도 크다. CU의 사례처럼 현지 고려인 네트워크를 활용한다면 진출 초기 마케팅과 유통망 진입이 한결 수월할 것이다.
출장에서 만난 고려인 3·4세 기업가들은 뿌리내린 새로운 조국의 발전에 대한 열망도 높았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기업 카스피안 그룹이 한국과의 협력을 추진 중인 알라타우 시티 프로젝트는 최대 도시인 알마티 옆에 첨단산업과 물류, 금융이 결합된 신도시를 개발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기술과 도시 개발 경험을 보유한 한국에는 진출 확대의 기회인 동시에 카자흐스탄에는 자원 의존형 산업 구조를 다변화해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협력이 곧 서로 다른 문화를 융합하던 비단길의 재현이 아닐까.
어느 시인은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라고 했다. 우리가 중앙아시아의 잊힌 비단길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흔적이 아닌 미래의 기회이며, 새로운 길을 함께할 친구다. 지정학적 요충지이자, 공급망 재편의 핵심 축으로 주목받는 중앙아시아 땅에 자랑스러운 고려인 동포들이 있음이 든든하다. 대한민국이 중앙아시아의 신(新)실크로드를 함께 손잡고 걸어갈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