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없는 세상 그린 만화책 여성의 공포 그려낸 것 같아 '말이 되는' 이야기로 다가와 책 사라진 세상 상상해보면 사람들이 긴 글 못 읽어내고 책 놓였던 공간서 땅싸움만 한낱 상상력에 불과하지만 책의 가치도 되새겨봤으면
얼마 전 아주 이상한 만화책을 읽었다. 생존해 있는 세상의 모든 여자가 같은 시간에 일제히 목을 찔러 자살한다. '여자 제로'의 세상이 됐다. 이후 인공수정으로 다시 여자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이들도 가임기가 되기 전에 모두 자살한다. 이로 인해 남자들은 연애와 섹스가 불가능해졌다. 세대를 거듭해서 이제 연애와 섹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남자들만 가득한 세상이 됐다. 남자들은 여자아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기 시작한다. 여성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고 무기가 될 만한 뾰족한 것들을 치웠지만 뾰족한 것은 어떻게든 만들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여자아이가 가임기가 되었는데도 자살하지 않는 '대사건'이 발생한다. 권력자들은 그녀에게 잘생긴 남자를 소개해주고 자연스럽게 연애를 유도하지만, 거의 일이 이루어지려는 찰나 여자는 남자를 죽이고 자살해버린다.
이게 이야기의 끝이다. 작가는 어떤 비판적 내용도 책에 담지 않았다. 풍자도 아니고 부조리도 아니다. 그저 그런 세계를 그릴 뿐이다. 도대체 이게 뭔가. 그런 당혹감 속에서 점점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씹던 껌을 뱉는 것보다 더 가볍게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실제로 여자들의 목숨이 그런 취급을 받아왔다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예외 없이'라는 조건 또한 모든 여성이 세상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가리키는 것 같다. 물론 내가 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이로써 말이 안되는 이야기가 내게는 갑자기 말이 되게 되었다.
허구적 이야기는 참 매력적이다. 작가는 신이 된 것처럼 세상을 자기 맘대로 창조할 수 있다. 가정법을 활용하면 뚝딱 그런 세상이 만들어진다. 내 방은 책으로 가득하다. 이 공간엔 나보다 책이 수백 배 많다. 평균으로 내면 전 세계에 책이 사람보다 많을 것이다. 이걸 단숨에 없애보자. 그러면 '책이 없는 세상'이 된다. 책이 없는 세상은 일찍이 존재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책이 있던 때보다 책이 없었던 기간이 더 길다. 유전자적으로 볼 때 인류에겐 책이 없다는 상황이 더 익숙한 것이 아닐까. 세상의 책이 갑자기 모두 사라져 없어져버렸을 때 사람들이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함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상상해보자. 여기에서도 어떤 깨달음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책에 없는 상황을 얘기한 김에 좀 더 나가보자. 세상에서 책이 사라질 수 있을까. 가령 이런 이야기이다. 영상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점점 긴 글을 읽지 못하게 된다. 책은 점점 얇아졌다. 그러다가 읽는 데 10분도 안 걸리는 책이 나온다. 그런 책은 책이 아니라는 반발에 책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게 된다. 또 이런 상황은 어떤가. 사회의 전문화·영역화가 너무 심화돼 이쪽 전문용어를 저쪽 사람들은 알 수 없게 된다. 책을 내면 모든 영역에 맞춰 번역을 해야 되고 결국 출판사들은 출판을 포기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또 어떤가.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에 책이 한 권도 없게 되었다. 그만큼 세상에는 빈 공간이 늘어나게 되었다. 책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은 의외로 넓었다. 지구 면적의 거의 10%에 육박했다. 그 공간을 둘러싼 재개발 붐이 일어나게 되고 서로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토론과 논쟁이 심화됐다.
분위기를 SF적으로 바꿔보자. 어느 날 지구 근처를 지나던 외계 행성의 탐사선단이 지구에 불시착했다. 이들의 우주선은 지구에서 연료를 구해야 했다. 연료는 특수한 다른 물질이었는데, 지구에서는 잉크와 가장 가까웠다. 그래서 우주인들은 자신들의 첨단 기술로 전 세계에 있는 책에 인쇄된 잉크를 모두 빨아들여 우주선으로 옮겨왔다. 이 어이없는 공격에서 100년 이상 지난 책들만 살아남았다. 잉크가 종이와 너무 밀착돼버려 빨려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인간들은 오래된 책만 읽고 살아가게 되었다.
물론 이 모두는 말이 안되는 내 천박한 상상력에 불과하다. 하지만 책에 너무 익숙한 인간들에게 책의 소중함이나 가치를 한번 되새겨보는 데 있어 '책이 없는 세상'이라는 가정법은 의외로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걸 소재로 제대로 된 소설을 한번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