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8.01 21:00:00
(12) 창조의 ‘온톨로지(ontology)’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이야기는 이제 너무 진부한 주장입니다. 이 주장이 진부하게 들리는 이유는 모방이 어떻게 ‘창조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지 분명하게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위스 발달심리학자 장 피아제가 대단한 심리학자인 겁니다. ‘지연모방’에서 ‘상징놀이’로의 발전 과정이야말로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기는 엄마가 전화기를 귀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그 행동을 즉시 따라합니다. ‘즉각모방(Immediate imitation)’ 단계입니다. 그런데 몇 시간이나 며칠이 지난 후, 아기는 귀에 손을 대고 ‘여보세요?’라고 합니다. 엄마도, 전화기도 없는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이를 바로 ‘지연모방(Deferred imitation)’이라고 합니다. 전화하는 행동이 ‘표상’ 형태로 아기의 머릿속에 있다가 시간이 ‘지연’된 후 모방행동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한동안 이런 지연모방이 반복되다, 어느 순간 전혀 다른 형태의 행동이 나타납니다. 아기가 바나나를 귀에 대고 ‘여보세요?’ 하는 겁니다. 여기서 바나나는 더 이상 과일이 아니라 전화기를 상징하는 물건이 됩니다. 바로 이런 현상을 피아제는 ‘상징놀이(Symbolic play)’라고 정의합니다. 바나나를 전화기로 사용하는 행동은 단순히 기억하고 반복하는 수준을 넘어, 아이가 대상의 실제적 용도를 상징적으로 변형하는 창조적인 행동입니다.
피아제의 ‘상징놀이’ 개념은 ‘모방에서 창조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놀라운 이론이기는 하지만, 이 같은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이 부족한 부분은 수십년이 지난 후, 다니엘 스턴이라는 정신분석학자의 ‘감각의 교차편집(cross-modal editing of the senses)’이라는 개념으로 채워집니다. 이 개념은 단지 아동의 ‘상징놀이’의 보충적 설명이 아닙니다. 창조성의 본질을 밝혀주는 개념입니다. 아울러 감각의 교차편집은 인간 ‘자의식’의 생성 과정을 밝혀주는 놀라운 개념입니다. 감각의 교차편집이라는 문화적 체험이 있었기에 인간은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을 개발하며 신처럼 창조주가 될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모방과 상징놀이, 그리고 인공지능까지 이어지는 ‘창조의 온톨로지’는 이 연재 기획을 많이 뛰어넘는 주제입니다.
하지만 소통이 왜 지금 한국 사회에서 긴급하게 요구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소통이 곧 창조’라는 명제를 증명해야 합니다. 간단하게라도 오늘날 가장 핫한 주제인 인공지능(AI)이 의사소통 발달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느닷없이 내 2만권의 책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자랑 좀 하겠습니다. 나는 책을 2만권 가까이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 독어, 일어, 한국어로 된 자료들이 분야별, 관심사별로 아주 정교하게 분류되어 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책을 한곳에 모아 두기 위해 여수 남쪽 끝 섬의 다 무너져 가는 미역 건조 창고를 사서 개인 도서관으로 개조했습니다. 사면의 벽이 모두 책장입니다. 책장은 8미터 높이의 천장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원고를 쓸 때면 미역창고에 들어가 일일이 자료를 뒤져가며 글 작업을 합니다.
한 단락을 쓰려면 최소 반나절이 걸립니다. 자료를 찾고, 요약하고, 연관 자료를 다시 찾고, 거의 시지프스의 노동입니다. 아주 고통스럽고 외롭습니다. 이렇게 수십년간 글을 쓰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내 삶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미역창고의 수많은 자료가 쓸모없어진 겁니다. 인공지능 때문입니다. 제시어만 입력하면 세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자료를 찾아줍니다. 와, 이건 몇 년 전만 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독일에 유학 갔을 때, 개가식(開架式) 도서관을 처음 경험했던 그 행복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한국 대학의 도서관은 대부분 폐가식(閉架式)이었습니다. 독일 대학의 개가식 도서관에서는 책장 사이를 산책(!)하며 마음대로 책을 꺼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목차와 색인을 뒤져가며 원하는 책을 정확하게 찾았을 때의 쾌감은 말도 못합니다. 전문 학술지도 찾으면 거의 다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원하는 자료는 다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인공지능으로 인해 겪는 이 변화는 그때의 개가식 도서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지식혁명’입니다. 원하는 자료를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꺼내줍니다. 자료 찾느라 힘들었던 글 쓰는 일도 이제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재미있고 즐거워졌습니다. 지난 60여년의 인생과는 정반대의 삶을 사는 느낌입니다.
인공지능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스탠퍼드대 교수였던 존 매카시(John McCarthy)입니다. 그는 1956년 미국 다트머스 회의에서 이 용어를 처음으로 제안하며, 하나의 독립된 학문 분야로 정립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덕분에 매카시는 오늘날까지 인공지능의 창시자로 여겨집니다. 1959년 그는 기계가 ‘상식(common sense)’을 가질 수 있는가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합니다. 기계가 단순한 명령 실행을 넘어 맥락·추론·유연한 판단 등을 수행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 제기입니다.
매카시는 이 논문에서 기계가 인간처럼 ‘상식적’이 되려면 복잡한 현실을 ‘문장’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지식 축적과 추론을 수행할 수 있는 ‘증명-기반 메커니즘(Proof-based mechanism)’이 필수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기계에 대한 상식의 공식화(formalization of common sense for machines)’라는 명제로 정리되며, 이후 기계가 인간처럼 문장으로 사고·추론할 수 있는 인공지능 연구로 발전합니다. 쉽게 말해, 새로운 지식을 문장 단위로 입력하여 기계 스스로 논리를 만들어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면 기계가 인간처럼 상식을 갖게 될 것이라는 가설이었습니다.
매카시의 ‘문장적 사고(Sentence-Based Reasoning)’ 구상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문제 제기였습니다. 그러나 지식 데이터가 커질수록 이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는 CPU 성능은 수천, 수백만배로 늘어나야 했습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울러 문장이 늘어날수록 전문가가 논리 규칙을 수작업으로 코딩해야 하는 모순도 있었습니다. 엄청난 기대를 모았던 매카시의 인공지능 기획은 이후 1970~1980년대에 ‘AI 겨울(AI Winter)’을 겪게 됩니다. ‘AI 겨울’은 인공지능 연구와 관련 산업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급속하게 식어 대규모의 연구비 감축이 이뤄지는 시기를 뜻합니다.
수십년간 지지부진하던 인공지능 연구가 급작스러운 변화를 맞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2012년 이미지넷(ImageNet) 대회였습니다. 이미지넷 대회는 컴퓨터가 사진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분류’하는지를 겨루는 대회입니다. 예를 들어, 고양이 사진을 보고 ‘고양이’라고 정확히 맞추는 확률이 얼마나 되는가를 비교하는 겁니다. 대회 참가자들은 ‘이미지넷’이라는 이미지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AI 모델을 훈련시킵니다. 그리고 본 대회에서 훈련 과정에서는 보지 못했던 이미지를 보여주고, 얼마나 정확히 맞추는지 평가해 순위를 정합니다.
2010년부터 시작된 이 대회에서 2012년 ‘알렉스넷(AlexNet)’이라는 AI 모델 등장은 ‘AI 겨울’을 끝내는 결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전년도보다 오류율을 무려 절반 가까이 낮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알렉스넷 쇼크(AlexNet Shock)’로 불립니다. 그만큼 인공지능 역사에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전 세계 학자와 기업들은 딥러닝에 집중했고, 이는 오늘날 우리 삶의 획기적 변화를 이끌어낸 얼굴인식, 자율주행, 챗GPT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인공지능의 발전을 논할 때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AI 혁명에서의 컴퓨터 ‘마우스’의 역할입니다. 인류의 지식역사에서 너무나도 결정적인 사건인데 이상하게도 언급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AI 혁명은 ‘마우스(mouse)’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간단히 한번 거슬러 올라가봅시다. 알렉스넷 쇼크는 ‘GPU(그래픽처리 장치·Graphics Processing Unit)’라는 컴퓨터 부품이 인공지능의 핵심 엔진으로 떠오른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GPU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GPU는 처음부터 인공지능을 위해 개발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컴퓨터 화면에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을 정밀하게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겁니다. 컴퓨터의 중요 연산처리는 CPU(중앙처리장치, Central Processing Unit)가 하고, GPU는 이를 보조하는 장치에 불과했습니다. 시작은 미약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창대해진 겁니다.
근원을 찾아가는 질문은 계속됩니다. 그렇다면 컴퓨터 화면에 그림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마우스가 사용되면서부터입니다. 마우스가 사용되기 이전의 대표적인 컴퓨터 운영체계는 MS-DOS(Microsoft Disk Operating System)입니다. MS-DOS는 문장으로 명령합니다.
인간이 논리적으로 명령하면 컴퓨터는 이 명령에 정확하게 반응했습니다. 인간과 컴퓨터의 관계는 일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우스를 사용하면서부터 인간과 컴퓨터의 관계는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마우스를 사용하는 윈도우즈나 애플의 MAC-OS를 ‘GUI(Graphical User Interface) 기반 운영체제’라고 합니다. 문장으로 명령하지 않고,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클릭하면서 운영하는 방식입니다. 인간은 마우스, 아이콘, 드래그 등을 통해 감각적 조작을 하고, 컴퓨터는 인간의 움직임에 즉각 반응하고, 피드백을 제공합니다. 인간과 컴퓨터가 아주 직관적으로 상호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의 인터페이스가 키보드에서 마우스로, 이어서 터치와 음성으로 진화하면서 컴퓨터와 인간의 상호작용은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과 매우 유사해졌습니다.
사실 마우스를 이용한 GUI를 처음 실험한 곳은 제록스의 팔로알토 연구소였습니다. 그러나 이 혁신적인 인터페이스는 당시에 상업적으로 전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이 기술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여긴 사람이 바로 애플의 스티브 잡스입니다. 그는 1984년 애플 매킨토시에 이 기술을 처음 적용했고, 이를 계기로 GUI 기반 컴퓨터 기술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습니다. 인간과 컴퓨터가 ‘마주 보며 소통하는’ 상호작용은 훗날 스마트폰과 인공지능 기술로 이어지는 상호작용적 인터페이스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초기의 GUI에서 그래픽은 CPU가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더 정교한 그래픽이 요구되면서 GPU라는 전담 부품이 등장하게 됐죠. 1993년 설립된 엔비디아는 바로 이 GPU를 만들던 작은 벤처 기업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엔비디아는 전 세계에서 시가총액이 가장 큰 기업이 되었습니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치고 말이지요.
한 마디로 정리하면, 내 수만권의 책을 순식간에 ‘장식용’으로 만들어버린 이 엄청난 AI 혁명이 그 작은 컴퓨터 마우스에서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그리 이상한 사건은 아닙니다. 인간 사고의 본질이 대단히 그래픽적(!)이기 때문입니다. 문장적 사고를 닮아 있는 MS-DOS에서 마우스를 사용하는 윈도우 운영체계로의 이행은 ‘AI 혁명과 창조성’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AI 혁명의 밑바닥에는 초기의 ‘문장적 사고’ 모델에 집착한 존 매카시 모델에서 마우스에 기반한 ‘시각적 사고’로의 전환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제 질문은 다시 심리학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우리는 문장으로 생각할까요 아니면 그림으로 생각할까요? 참으로 오랫동안 인간은 문장으로 사고한다고 여겨졌습니다. ‘로고스(Logos)’, 즉 ‘말’ ‘이성’ ‘논리’에 기초한 서구 사회의 ‘로고스 중심주의(Logocentrism)’의 영향입니다. AI 혁명은 바로 이 로고스 중심주의의 붕괴를 뜻합니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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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20호 (2025.07.30~08.0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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