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의 '지성과 반지성' "이 시대는 고민이 없다" 첫 문장부터 무념의 사회 비판 생각 사라지면 불신·갈등 퍼져 지친 국민들 사이 무력감 팽배 보고서 둘러싸였을 대통령 책상 고독한 자리이나 고립돼선 안돼 고민하고 경청하는 지도자 되길
초봄의 한낮, 김병익 평론가와 마주 앉을 기회가 있었다. 지난해 송고했던 한 편의 기사를 뒤늦게 읽고 "얼굴이나 보자"는 연락을 해온 그였다. 문학과지성사 창간 동인이자 언론계 원로인 김 평론가는 저서 '지성과 반(反)지성'을 냈다가 금서로 묶인 경험이 있는, 한국 현대사의 깊은 내력을 지닌 인물이다.
아득한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일면식 없던 후배가 자신의 오래된 저작에 얽힌 일화를 기사로 다룬 일이 반가웠던 까닭인지, 단출한 테이블 위에선 음식 맛보다도 격려와 존경심의 언사가 풍미를 더했다.
그 책 '지성과 반지성'을 집어 들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50년 전 책의 존재를 알고 어느 주말 짬을 내 대학 도서관을 찾아 초판본 표지를 넘기다 첫 문장에서 몸을 떨었다.
"이 시대는 고민이 없다. 우리의 이 사회는 고민을 용납하지 않으며 고민에 투신하기보다 그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회피하기를 요구한다. 우리의 이 풍토는 고민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무엇을 고민하는가에 대해 고백하지 않으며 왜 고민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념(無念)하기를 요구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무념.' 그것의 요즘 말은 체념이거나 내면화된 침묵일지 모른다. 권력의 반복되는 배신과 진영 간 정쟁에 지친 시민들은 무력감에 길들여졌고, 그 감각은 점차 냉소로 퇴색했기 때문이다. 무사유의 일상에 익숙해진 시민들은 지성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다. 결과는 어떤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불의도 포옹하며, 정의조차 실익에 따라 판별하려 든다.
'지성과 반지성'을 읽으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 책은 미국 정치사상가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의 반지성주의'에 빚을 지고 있다. 호프스태터는 그 책에서 한 사회가 어떻게 지성(intellect)을 불신과 적대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는지를 수백 년에 걸쳐 추적한다.
청교도적 윤리와 자본주의의 경직된 도덕성 속에서 철학적 성찰은 '불온한 것'으로 치부됐고, 전문가의 권위는 대중주의(포퓰리즘)에 의해 일축됐다. 정치는 거시적 진실보다 일반인 눈앞의 상식만을 진실로 포장했다. 그 결과, 정책은 단순한 슬로건과 음모론 속에 흡수됐다. 호프스태터는 이를 '반지성주의'라 명명했고, 이 책으로 1964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한국은 어떤가. 놀랍게도 '반지성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화두에 오른 것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취임사에서였다. 그는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고 천명했지만, 계엄 논의와 헌정 질서의 위기, 탄핵과 정권 교체를 복기해 보면 오히려 그가 그토록 경계했던 반지성주의가 그의 재임 기간 속에도 응축돼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감히 상상하기로, 대통령의 책상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자리다. 하루에도 수십 장의 보고서가 통계화된 고통을 보여주고 해법은 늘 대통령 자신에게 요구된다. 하지만 대통령직이 고독하다 해서 고립될 권리까지 허락되진 않는다. 위대한 지도자란 고립 속 단독자로서의 결단이 아닌, 고민하고 경청하는 힘을 지닌 자다.
다시, 초봄의 한밤. 당시 크게 화제가 됐던 영화 '콘클라베'에서 로런스 추기경은 "가장 위험한 건 의심을 품지 않는 확신"이라고 했다. "확신은 통합의 가장 큰 적이고, 관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그러니 의심하는 교황을 보내주십사 주님께 기도합시다."
호프스태터의 '지성', 김병익의 '고민', 로런스의 '의심'은 같은 말이다. 고민하는 지도자, 의심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정치적 유불리가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