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6.13 12:26:08
(22) 유방의 반란과 참여 제약의 위반
일찍이 상앙(商鞅)의 법가(法家)를 받아들여 법을 통한 통치를 폈던 진(秦)나라는 급속도로 부국강병을 이루어 마침내 진시황제 통치 기간 중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간단하게 설명해보면 법의 가장 큰 목적은 도둑을 막는 것이다. 사실 도둑질은 아주 매력적인 일인데, 스스로 일하지 않고 놀다 남이 열심히 일해 생산한 것을 가로채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가로채서 자기가 취하는 행동을 경제학에서 ‘무임승차(free ride)’라고 한다. 무임승차를 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사회는 구성원들이 근로 의욕을 상실해 바로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경제학에서는 사람이 도둑질을 하는 것보다 정직하게 생산 활동을 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을 ‘인센티브 제약(incentive constraint)’이라고 부른다. 만일 도둑질을 해도 벌이 약하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도둑질을 해 무임승차를 시도할 것이므로 도둑질에 대한 벌이 충분히 강해야 무임승차를 막을 수 있다는 의미다.
진나라 법가 사상은 충분한 인센티브 제약을 백성에게 강제해 진나라 백성은 도둑질을 하면 오히려 손해이므로 무임승차를 포기하고 열심히 생산 활동을 했다. 엄격한 법률을 적용해 무임승차를 막았던 진나라가 부국강병을 이루어서 중국을 통일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진시황제는 법가 사상을 전 중국에 적용했다.
그런데 진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끌었던 법가 사상은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에는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후에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漢)나라를 세우는, 당시 초(楚)나라 작은 마을의 정장(亭長) 벼슬을 했던 유방(劉邦)의 일화다.
정장은 대단한 직책은 아니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통반장이나 마을 이장 정도 지위였다. 그런데 진나라 통치 아래서 정장에게 아주 중요한 임무가 부여되는데 바로 마을 사람을 통솔해서 부역하는 장소까지 데리고 가는 일이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거대한 토목 공사를 벌이기 시작했는데 만리장성, 진시황릉, 아방궁 공사가 가장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현재 기준으로도 이 세 가지 공사는 그 규모가 대단한 것인데 지금부터 2200년 전 아무런 기술이나 장비 없이 사람 손으로 이런 거대한 토목 공사를 했다면 그 공사에 참여한 백성의 고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수년간 가족과 고향을 떠나 고생을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공사에 참여한 사람 중 상당수가 각종 사고와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진시황제의 이런 토목 공사에 참여하기를 꺼렸다. 마을 정장은 이런 부역에 끌려가는 사람들이 중간에 도망치지 않고 모두 공사장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인솔하는 역할을 맡았다. 중간에 도망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생기거나 정해진 날짜까지 도착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 인솔자인 정장에게 사형과 같은 큰 벌을 주었다고 한다. 잘못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법가 사상인 것이다.
문제는 정이 많은 유방이 자신이 인솔해 부역에 끌려가는 마을 사람을 잔혹하게 대하지 못해 중간에 많은 도주자가 발생했고, 또 쉬엄쉬엄 가다 보니 도저히 제날짜에 도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사실이다. 이제 남은 인원을 이끌고 늦게 토목 공사장에 도착한다고 해도 유방은 거의 죽음에 가까운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유방은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길을 선택하는데 바로 남은 마을 사람을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도적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름 큰 규모 도적단의 두령이 된 유방은 결국 진시황제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 도적단을 이끌고 진나라와 싸우는 반란군을 결성해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유방의 사례는 너무도 명백하게 진나라 법가 사상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은 마을 정장이라는 보잘것없는 벼슬을 하고 있지만 먹고사는 데 문제가 없던 유방은 굳이 목숨을 걸고 도적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백 명의 마을 사람을 진나라 토목 공사장까지 이탈 없이 날짜에 맞추어 데리고 가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지시를 수행하다 실패하자 유방은 산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법이라는 것은 도둑질을 막기 위한 것인데 오히려 진나라의 법이 선량한 유방을 도둑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경제학의 ‘참여 제약(participation constraint)’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제학에서는 법이나 정책을 제정함에 있어 앞에서 소개한 인센티브 제약과 함께 반드시 고려해야 할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고 보는데 이게 바로 참여 제약이다.
도둑질을 막기 위해서는 충분히 강력한 벌이 부과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센티브 제약이다. 그렇다고 벌이 한없이 강하면 안 된다는 것이 바로 참여 제약이다. 아무리 법이 있다고 해도 그 법을 위반하는 경우가 생길 것인데 그 경우 부과되는 벌이 너무 강하면 아예 법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생길 것이므로 백성이 법을 지키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할 수준으로 벌이 강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현대 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업 이윤이 높아질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가능한 한 직원들이 많은 일을 하도록 하면서 임금은 가능한 한 적게 주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기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각 직원에게 목표를 주고 그 목표를 달성하면 상을 주는 반면 목표 달성이 안 되면 벌을 주는 인센티브 제약이 필요하다. 하지만 기업의 이윤 추구 행동이 지나쳐서 직원 불만이 쌓이고 그래서 참여 제약이 깨지면 직원들은 그 회사를 떠나 다른 직장을 찾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진나라와 동시대에 서양 유럽 사회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 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 군대에는 ‘데키마티오(Decima tio)’라는 형벌이 존재했다. 어떤 특정 부대가 비겁한 행동을 해서 로마 군인 정신을 위배했을 경우 시행되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는데, 잘못을 한 부대의 병사들이 제비를 뽑아 열 명 중 한 명 비율로 처형받을 병사를 정한 후 다른 90%의 병사들이 제비에 뽑힌 10%의 전우를 몽둥이로 쳐서 죽이는 형벌이었다. 당연히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심각한 인권 문제가 있는 잘못된 처형 제도였지만, 2000년 전 로마에서 이런 제도를 시행한 것에는 경제학의 참여 제한을 고려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어떤 로마 부대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모두에게 중대한 벌을 내리게 된다면 아마도 해당 부대는 유방처럼 도주해 오히려 로마 군을 위협하는 존재로 변할 가능성이 있었을 터. 하지만 잘못을 저질러 군대에 복귀했을 때 처벌을 받게 되더라도 그 확률이 10%에 불과하다면 해당 병사들은 차라리 부대에 복귀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 자신과 가족이 영원히 배신자 낙인이 찍히는 도적이나 반란군으로 변하기보다는 90% 확률로 살아남아 여전히 로마 병사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을 좇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자신도 같은 잘못을 저지른 상황에서 전우 한 명을 아홉 명이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형벌 자체의 잔혹성 때문에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면 안 된다는 인센티브 제약 효과는 충분할 것이면서 동시에 90% 확률로 생존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처벌을 감수하는 참여 제약의 조건도 만족시킬 수 있는 나름 절묘한 제도가 로마 군의 데키마티오였다.
이런 미세하지만 중요한 제도적인 차이 때문인지 진나라 법가 사상과 로마의 로마법은 모두 역사적으로 유명하고 중요한 제도지만, 진나라는 진시황이 사망한 후 바로 멸망했던 것에 반해 로마 제국은 그 이후 동로마 제국 역사까지 포함하면 1000년 이상 이어질 수 있었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14호 (2025.06.18~25.06.2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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