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적 금융 서비스 탓 美 혁신적 핀테크 출현 AI 인프라도 혁신 시동 韓, 패러다임 전환 방관
미국에서 근무할 때 실제 겪은 일이다. 회사 사무실 렌트비를 종이 수표를 쓰고 건물주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늘 그렇듯이 계좌에서 전달과 비슷한 시기에 렌트비가 출금됐다. 그런데 보름쯤 지나서 건물주에게서 연락이 왔다. 렌트비가 연체됐다는 것이다. 수취인이 수표를 현금화해서 계좌에서 출금된 것도 확인했는데 황당했다.
은행 신고 절차는 까다로웠다. 수표를 정상적으로 발송했고, 출금까지 됐지만 수취인(건물주)으로 기재하지 않은 사람이 출금했다는 주장에 대해 공증을 받아오라고 했다. 건물주도 마찬가지였다. 수표를 받은 적이 없고 현금화한 사람은 제3자라는 점을 서류로 작성하고 공증을 받아 은행에 제출해야 했다.
이런 절차가 끝나야 수표 발행 은행은 수표를 현금화한 은행과 책임 소지를 다투는 절차를 시작했다. 누군가 수표를 중간에 가로채 위조한 서명으로 현금화했음이 밝혀졌다. 이걸 확인하기까지 3주가 걸렸다. 수취인 서명을 위조해 현금화한 것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은행 측 과실이 인정돼 렌트비를 돌려받는 데는 약 한 달이 걸렸다.
세계 최대 경제강국이자 세계 최고 금융강국인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한국에서 착오송금 사고가 더러 발생하지만, 이는 수신인 계좌를 잘못 입력한 실수 탓이다. 미국에선 여전히 종이 수표를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표 사고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미 재무부 산하 금융범죄단속국(FinCEN)에 따르면 우편 절도로 의심되는 수표 사기 사건이 작년 상반기에만 1만5417건이 발생했다. 관련 거래액은 6억8800만달러에 달했다.
미국에선 역설적으로 이런 구석기 시대 같은 금융 관행이 존재하기에 혁신적 핀테크 기술이 잉태되고 있다. 은행과 무관하게 전화번호 또는 이메일 주소만 알면 실시간 송금이 가능한 젤(Zelle)은 생활 속 깊숙이 자리 잡았다.
달러가 글로벌 통화로 패권을 유지한 것은 SWIFT(국제금융 결제망 송금서비스)가 있기에 가능했다. 전 세계 모든 은행은 SWIFT가 부여한 8~11자리 고유한 코드로 분류됐고, 글로별 경제의 실핏줄 같은 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를 통해 국가 간 결제, 무역 등 경제활동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용도 비싸고 송금에 2~3일씩 걸리는 방식은 점차 외면받을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실시간 송금이 가능하고, 수수료를 획기적으로 낮추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아멕스, 산탄데르은행 등과 제휴한 리플(XRP) 코인을 기반으로 한 리플넷(RippleNet)이 대표적이다.
이런 기술적 진보는 빛의 속도로 이뤄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가상화폐·인공지능 차르(Czar·황제)를 맡고 있는 데이비드 색스는 '100만배의 도약'을 예고했다. AI모델은 매년 약 3~4배씩 발전하고 있고, 이런 속도로 발전하면 2년 만에 10배, 4년 후 100배의 발전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100배의 향상된 모델이 100배의 향상된 반도체 위에서, 100배 더 많은 칩을 가진 데이터센터에서 작동하면, AI는 100만배 더 강해진다는 논리다.
미국은 100년 이상 선진국의 지위를 누렸지만 시간이 흐르며 최고였던 인프라가 낡은 인프라가 됐다. 느리고 더디기 때문에 혁신이 파고들 여지가 곳곳에 있다.
한 번 혁신의 불꽃이 튀면 가장 큰 시장이라는 무기가 따라온다. 압축 성장으로 이 궤도에 오른 한국은 어중간한 위치에서 성장 엔진이 꺼져가고 있다.
100만배의 도약 물결에 올라타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 지금이라도 냉철하게 우리 현주소를 되돌아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