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1.21 17:57:24
2024년 12월 7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 앞에는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새벽부터 인파가 모였다.
국내서 열리는 최대 규모의 서브컬처 종합 행사인 ‘애니메이션 X 게임 페스티벌(AGF) 2024’에 입장하기 위해 관람객들의 발길이 몰린 것이다.
서브컬처는 주류 문화와는 다른 ‘하위문화’를 일컫는 말로, 애니메이션·게임 등에서는 일반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풍의 소재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를 서브컬처로 묶어 부른다. 이날 킨텍스 행사장 내부는 물론 건물 밖까지도 대기줄이 이어졌으며, 일부 인원은 개막 전날부터 인근에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나 서브컬처 게임 콘텐츠를 만나고, 원하는 굿즈를 얻기 위해서다.
AGF 조직위원회에 따르면 AGF 2024가 열린 이틀간 현장을 찾은 관람객 수는 2023년보다 약 10% 증가한 7만2000여 명으로 파악됐다. AGF 2024 관람객들은 나루토 등 유명한 애니메이션 캐릭터부터 각자 플레이하는 게임 주인공까지 다양한 캐릭터의 모습으로 분장하며 저마다의 모습으로 행사를 즐기고 있었다. 현장 관람객들의 열기는 매년 약 20만 명이 찾는 국내 최대 게임 박람회 ‘지스타(G-STAR)’에 못지않은 모습이었다. AGF의 규모가 매년 커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국내에서 서브컬처 시장과 이용자층이 꾸준히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AGF 2024에서 눈에 띄는 지점은 서브컬처 게임사들이 대거 부스를 선보이면서 많은 관람객이 몰린 것이다.
메인 스폰서로 참가한 곳은 인기 게임 ‘명조: 워더링 웨이브’를 개발한 중국 게임사 쿠로게임즈로, 체험 및 이벤트 공간과 함께 GS25와 협업한 굿즈 판매 공간도 선보였다.
또 다른 스폰서인 스마일게이트를 포함해 네오위즈, 넷마블, 라이온하트스튜디오, 위메이드커넥트 등 국내 게임사들도 부스를 내고 자사 게임 팬들을 맞았다.
게임업계는 그동안 AGF에서는 ‘A’를 담당하는 애니메이션의 비중이 컸지만, 최근 들어 ‘G’의 게임이 급성장하며 행사 확장을 견인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만큼 서브컬처 게임 시장이 이제는 수면 위로 올라오며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AGF에서 게임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게임사들이 큰 부스를 차리기 시작했다”라며 “서브컬처가 이제 양지로 떠오르고 게임 쪽에서도 많이 다루는 장르가 됐다”라고 설명했다. 미래에셋증권 리서치센터에 따르면 지난 2018년부터 2023년까지 전체 게임 시장이 연평균 5.2% 성장한 가운데 서브컬처 게임은 16.7%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러한 성장세의 시작에는 대표적인 서브컬처 게임으로 꼽히는 중국 호요버스의 ‘원신’이 있다. ‘원신’은 중국 시장을 넘어 한국 등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키면서 그동안 음지로 분류됐던 서브컬처 장르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원신’ ‘붕괴: 스타레일’과 같은 게임들이 계속 나오고 흥행에도 성공하고 있어서 서브컬처 장르는 계속 성장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서브컬처 게임의 경우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핵심 콘텐츠다. 캐릭터들에 대한 팬덤이 성공적으로 형성되면 게임에 대한 이용자들의 충성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서브컬처 게임들의 경우 일정한 주기로 새로운 캐릭터를 출시하는데, 이때마다 새로운 캐릭터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이용자들을 통해 게임사 입장에서는 지속적인 매출 창출이 가능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호요버스의 ‘원신’ 또한 뛰어난 그래픽과 게임성, 현지화 전략 외에도 다양한 캐릭터의 매력도와 촘촘한 세계관을 통해 이용자들의 몰입을 가능케 했다는 점이 흥행의 원동력으로 꼽힌다. 원신이 대중적으로 성공하며 국내에서도 넥슨의 ‘블루 아카이브’, 시프트업의 ‘승리의 여신: 니케’와 같은 글로벌 히트작이 나오기 시작했다. 앱 통계 분석 플랫폼 센서타워에 따르면 2021년 2월 일본서 먼저 출시된 넥슨의 ‘블루 아카이브’의 경우 2024년 2월 서비스 3년만에 전 세계 누적 매출 5억 달러(약 7000억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서브컬처 게임을 즐겨 하는 직장인 이모씨(31)는 “캐릭터들이 매력적이고, 새로운 캐릭터가 나오면 구매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 계속 플레이하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게이머의 입장에서는 캐릭터 획득 등이 과금 요소로 작용하긴 하지만, 게임 속 캐릭터를 키우기 위해 많은 과금을 필요로 하는 기존 국내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대비 서브컬처는 상대적으로 과금성이 낮은 편에 속한다. 특히 과금을 통해 강해지면서 더 많은 재미를 얻을 수 있는 일부 MMORPG 게임들과 달리, 과금이 없어도 즐기는 데 큰 장벽이 없다는 점이 게이머에겐 매력적인 요소다. 임희석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서브컬처 게임은 초기 이용자들이 충성 고객으로 전환되면서, 이용자당 평균 매출(ARPU)이 상대적으로 낮더라도 장기적인 매출이 발생한다”라며 긴 라이프사이클을 서브컬처 게임의 장점으로 꼽았다.
성공한 서브컬처 게임을 갖게 되면 게임사 입장에서는 해당 게임을 기반으로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굿즈를 선보이는 등 IP 확장을 통한 수익 다각화가 가능해진다. 대표적인 사례로 넥슨은 편의점 GS25와 협업해 게임 ‘블루 아카이브’ 빵 6종을 2024년 5월 선보인 바 있다. 빵 안에는 총 71종의 캐릭터 스티커가 들어있었는데, 이를 모으기 위한 팬덤들이 몰리며 블루 아카이브 빵은 출시 47일 만에 200만 개 판매를 돌파했다.
다양한 포켓몬 띠부띠부씰을 모으기 위해 포켓몬빵 열풍이 분 것과 유사한 사례다. 그만큼 서브컬처 팬덤의 힘이 강력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GS25뿐만 아니다. 삼성전자도 서브컬처 게임과 협업을 통해 쏠쏠한 재미를 봤다. 삼성전자는 2024년초 갤럭시 S24 시리즈 출시 후 호요버스와 협업해 게임 ‘붕괴: 스타레일’의 캐릭터를 활용한 액세서리 에디션을 선보였다. 해당 에디션은 기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액세서리 세트로 가격이 30만원이 넘었지만 수 분 만에 매진됐다. 스마트폰 케이스를 포함해 다양한 굿즈, 심지어 게임 캐릭터 목소리를 입힌 삼성의 빅스비 보이스 등이 포함되면서 이용자들의 팬심을 자극한 것이다. 이처럼 대기업과 서브컬처 게임 간 협력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도 서브컬처 장르가 주류로 부상했음을 보여주며, 소비력을 갖춘 팬덤이 이제는 시장 트렌드까지 이끌고 있는 모양새다.
서브컬처의 인기가 계속 이어지면서, 그동안 서브컬처 게임을 개발하지 않았던 게임사들도 서브컬처 분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배틀그라운드’로 전 세계를 사로잡은 크래프톤은 크래프톤 사상 처음으로 서브컬처 게임 개발에 본격 돌입했다. 서브컬처 게임들이 전 세계서 잇따라 흥행하면서, 서브컬처 장르는 더이상 비주류 장르가 아닌 수 많은 게임사가 눈독 들이는 영역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게임업계에 따르면 크래프톤은 한국 본사뿐만 아니라 일본 법인인 크래프톤 재팬을 통해 신규 서브컬처 프로젝트인 ‘키즈나’ 셀에 참여할 애니메이터 등 현지 인력을 확충하고 있다.
크래프톤은 키즈나 셀을 구성하고 2024년 7월 신규 서브컬처 게임인 ‘프로젝트 C3(가칭)’ 개발에 돌입한 바 있다. 해당 게임은 크래프톤 산하 제작사 펍지 스튜디오가 크래프톤 재팬과 공동으로 추진하는 프로젝트로, 2024년 9월부터 국내서 관련 인력 채용을 나선 데 이어 일본에서도 인재 영입에 나선 것이다. 초기 기획 단계인 만큼 게임의 윤곽이 나오진 않았으나, 크래프톤은 초기부터 공을 들이고 있다. 크래프톤은 “일본에 조예가 깊은 디렉터나 대형 타이틀의 참가 경험이 있는 애니메이터를 중심으로 게임을 제작할 예정”이라며 공고를 통해 일본 현지에서 흥행한 게임에 참여한 경험 등을 지원 조건으로 내걸었다. 크래프톤이 일본에서 관련 인력 확충에 나선 것은 일본 시장이 서브컬처의 본산지이자 서브컬처 게임 흥행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시장이기 때문이다. 국내 작품 중 대표적인 성공작 중 하나인 시프트업의 ‘니케: 승리의 여신’의 경우 2024년 5월 기준 누적 매출에서 일본 시장의 비중이 50.9%에 달한다. 배틀그라운드를 서비스하는 크래프톤은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 ‘인조이’를 개발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왔지만, 서브컬처 게임 개발에 뛰어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크래프톤뿐만 아니라 그동안 역할수행게임(RPG) 장르를 주로 제작해 온 엔씨소프트도 2024년 8월 서브컬처 게임 개발사인 ‘빅게임스튜디오’에 370억원을 투자해 지분 16.8%를 확보했으며, 빅게임스튜디오가 개발 중인 신작 ‘브레이커스’의 글로벌 판권을 확보했다. 브레이커스는 내년 중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넷마블의 경우 2024년 웹소설·웹툰을 원작으로 한 ‘나 혼자만 레벨업: 어라이즈’로 글로벌에서 성과를 거두며 2024 대한민국 게임 대상을 차지한 바 있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성공을 이어가고 있는 시프트업은 2024년 10월 중국 정부로부터 현지 서비스 허가권 개념인 판호를 발급받으면서 중국 시장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현재 시장에서는 ‘승리의 여신: 니케’가 2025년 2분기 내로 중국에서 출시될 것으로 관측된다.
다른 국내 게임사들도 서브컬처 흥행작을 확보하기 위한 신작 개발에 한창이다. ‘블루 아카이브’로 한국을 넘어 일본 시장 흥행에도 성공한 넥슨은 차기 작품인 ‘프로젝트 RX(가칭)’를 준비하고 있으며, 카카오게임즈 산하의 라이온하트 스튜디오도 내년 출시를 목표로 ‘프로젝트 C(가칭)’를 개발하고 있다. 게임 ‘에픽세븐’을 개발한 스마일게이트 또한 내년 출시를 목표로 ‘카오스 제로 나이트메어’를 준비하고 있다.
다만 흥행하는 장르라고 해서 모든 서브컬처 작품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캐릭터의 매력도와 함께 깊이 있는 세계관을 통해 얼마나 이용자들을 몰입시킬 수 있는지, 게임의 일원으로서의 소속감을 고취시킬 수 있는지가 흥행 여부를 가른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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