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흥민은 22일(한국시간) 스페인 빌바오의 산 마메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잉글랜드)와의 2024~2025 유럽축구연맹(UEFA) 유로파리그 결승전 후반 22분 히샤를리송 대신 교체 투입돼 토트넘의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가 끝날 때까지 뛰었다. 측면 공격수로 나섰지만 맨유의 후반 공세를 막기 위해 주로 수비 역할에 치중하던 손흥민은 토트넘의 1대0 승리로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무릎을 꿇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감격해했다.
이날 전반 42분에 터진 브레넌 존슨의 선제골을 끝까지 지킨 토트넘은 2007~2008시즌 잉글랜드 리그컵 우승 이후 17년 만에 공식 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유럽 클럽대항전에서는 유로파리그의 전신인 UEFA컵을 제패한 1983~1984시즌 이후 41년 만이다. 올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17위에 그쳐 사상 최악의 시즌을 보내던 토트넘은 유로파리그 우승으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이날 동료들의 축하를 한꺼번에 받은 손흥민은 시상식에서 알렉산데르 체페린 UEFA 회장으로부터 가장 먼저 유로파리그 우승 트로피인 UEFA컵을 받고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그의 허리에는 태극기가 둘려 있었다. 한국 선수가 UEFA컵을 들어 올린 건 독일 무대에서 두 차례 우승했던 차범근(1980·1988년)과 러시아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활약한 김동진, 이호(이상 2008년)에 이어 손흥민이 네 번째다. 높이 65㎝, 무게만 약 15㎏에 달하는 UEFA컵을 든 손흥민은 "항상 꿈꿔왔던 순간이 현실이 됐다. 우승한 오늘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됐다"며 활짝 웃었다. 평소 겸손을 강조하는 인터뷰를 해오던 그도 우승을 차지한 뒤에는 스스로 "이제 토트넘의 레전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손흥민은 동북고에 재학 중이던 2008년 대한축구협회의 우수선수 국외 유학 프로그램 대상자로 뽑혀 독일 함부르크 유소년 팀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유럽 무대에 첫발을 내디뎠던 손흥민은 어렸을 때부터 다져온 탄탄한 기본기와 빠른 발재간을 앞세워 2010~2011시즌 함부르크 성인 팀에 데뷔했다.
당시 박지성, 이영표 등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던 선배 선수들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기대를 모은 손흥민은 이후 15년 동안 줄곧 유럽 무대를 지켰다. 2013년 독일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뒤 2015년 7월에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과 계약해 10년간 뛰었다. 2021~2022시즌에는 한 시즌 23골을 넣고 아시아 최초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면서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토트넘에서 어느새 10시즌째 누빈 손흥민은 통산 454경기(컵대회 포함)에 출전해 173골 101도움을 기록하면서 팀의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우승과는 지독하게 인연을 맺지 못했다. 2016~2017시즌 프리미어리그와 2018~2019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2020~2021시즌 잉글랜드 리그컵에서 준우승만 3차례 기록했다. 국가대표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15년 호주 아시안컵에서 개최국 호주와의 결승에서 1대2로 패해 준우승한 아픔을 겪었다. 웃는 일보다는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았다.
2024~2025시즌 손흥민은 어느 때보다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시즌 초부터 햄스트링과 허벅지 부상이 있었고, 지난달에는 오른 발등을 다쳐 한 달 넘게 경기를 뛰지 못했다. 올 시즌 리그, 컵대회를 통틀어 46경기에서 11골 12도움을 기록했지만 예년에 비해 경기력이 떨어졌다는 평가 속에 나이가 들어 경기력이 감퇴하는 현상을 뜻하는 '에이징 커브' 논란이 일었다. 최근에는 사생활 협박 사건으로 홍역을 치렀고 사우디아라비아 이적설도 제기됐다.
힘든 상황에서도 손흥민은 유럽 무대 첫 우승만을 바라보고 달렸다. 그는 유로파리그 결승전을 앞두고 "우승이라는 마지막 퍼즐 조각을 10년 동안 찾고 있다. 이번에는 반드시 퍼즐을 완성하고 싶다"면서 우승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부상에서 회복한 뒤 자신이 돋보이기보다 동료를 돕고 헌신하는 데 집중하면서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손흥민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주장으로서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겪었다. 시즌 전체를 보면 힘들었지만 선수들끼리 똘똘 뭉쳤다. 항상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했고, 조언하려고 노력했는데 훌륭한 선수들과 함께할 수 있어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손흥민은 자신을 응원한 한국 축구팬을 향한 메시지를 전할 때는 눈물을 보였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정말 자랑스럽다"며 "가족처럼 응원해주신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손흥민의 우승은 토트넘뿐 아니라 주요 유럽 매체에서도 대서특필할 만큼 화제를 모았다. 토트넘은 "역사를 만든 레전드, 메이저 트로피를 이끈 첫 한국 출신 주장"이라는 설명을 달고, 손흥민이 태극기를 두른 모습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이번 우승으로 토트넘은 차기 시즌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다시 뛸 자격을 얻었다. 손흥민은 "챔피언스리그는 세계 최고 팀들과 겨룰 수 있는 무대라 정말 기대된다. 다시 한번 도전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1월 손흥민과 장기 계약 대신 1년 계약 연장만 선택한 토트넘에서 계속 뛸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토트넘과 계약 기간은 내년 6월까지다.
[김지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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