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제국의 숨은 조력자 ‘거상’ 토머스 그레셤

슬픔도 세월 속에 풍화하기 마련인가 봅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두 아들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난 지 몇 달. 다시 삶의 의지가 작은 불꽃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지친 내 옆을 지켜주던, 위로를 건네주던 남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생기고 건실하기까지 한. 죽은 남편을 참 많이 닮은 남자. 어느 날 그가 건넨 꽃다발에 눈물이 터졌습니다. 결혼하자는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눈만을 그윽하게 쳐다봐 주던 새 남편. 결혼 후부터 그의 눈길은 자주 ‘장부’로 향했습니다. 전 남편이 모아놓은 재산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랑했던 건 제가 아니었습니다. 재산이었습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 모든 행위가 그의 계산 속에서 이뤄지던 것이었습니다.
새 신부의 돈을 빼돌린 잔혹한 남자의 이름은 토마스 그레셤. “악화가 양화를 구축(내쫓는다는 뜻)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은 이 남자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동시에 잉글랜드를 세계적인 국가로 만든 사내이기도 했습니다. 사생활에서도, 공인으로서도 계산과 실리에 밝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잔혹한 성정이 세계 경제를 이끈 동력이라는 역설. 오늘의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잉글랜드의 메뚜기 그레셤
‘그레셤’. 1500년대 잉글랜드 런던에서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무역인 집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작부터 전설이었습니다. 수백 년 전 한 마을에서 어떤 여인이 메뚜기가 크게 우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니 한 고아가 버려진 채 울고 있었습니다. 그레셤 가문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레셤이 ‘메뚜기’를 가문의 상징으로 삼은 이유였습니다.
그레셤의 메뚜기 소리는 잉글랜드 전역에 울렸습니다. 잉글랜드 섬유를 네덜란드에 수출하고, 그곳의 곡물을 수입해 부를 쌓으면서였습니다. 형 리처드와 동생 존은 이 부를 기반으로 런던시장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잉글랜드에서 의류 무역을 담당하는 상인을 ‘머서(Mercer)’라고 불렀는데, 그 최고봉에 있던 사람이 바로 리처드와 존 형제였습니다.
리처드가 1519년 아들을 낳았습니다. 토마스 그레셤이었습니다. 아버지 리처드와 삼촌 존이 일군 부 속에서 그는 상인 정신을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물건이 다른 나라에서 더 큰 가치를 갖는다는 무역의 원리를 새기는 것이었습니다. 낮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이론을 배우고, 저녁에는 무역회사에서 실무를 학습하는 일. 경제란 그의 핏속에서 흐르는 것이었고, 뼈에 각인된 것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24세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패밀리 비즈니스에 뛰어듭니다.
잉글랜드 런던에서 네덜란드 앤트워프(현재는 벨기에 도시)까지. 그는 글로벌 노마드였습니다. 당시 앤트워프는 세계 최고의 무역도시이자 금융 기법이 가장 발달한 도시. 오늘날 뉴욕에 버금가는 곳이었지요. 토마스 그레셤이 경제인으로 성장하기에 이만한 도시가 없었습니다. 그레샴은 세계가 작동하는 경제 원리를 체득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그레셤의 나이 어느덧 24살이었습니다. 앤트워프와 런던을 왔다 갔다 하는 바쁜 삶. 아버지와 삼촌은 그에게 결혼을 권합니다. 애가 둘 딸린 과부 앤 퍼넬리였습니다. 남 부러운 것 없는 집안에서 자란 훤칠한 아들을 과부에게 장가보내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앤 퍼넬리의 전 남편이 런던에서 알아주는 상인 윌리엄 리드였기 때문입니다. 윌리엄이 이른 나이에 사망하자 재빠르게 앤과 결혼을 추진합니다. 그녀의 재산을 그레셤 가문의 사업자금으로 활용한다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레셤 가문에겐 결혼도 비즈니스의 일환이었기 때문입니다.
토머스 그레셤은 결혼을 철저히 사업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앤 퍼넬리와 아들 하나를 낳은 뒤부터는 주로 앤트워프에 거주합니다. 정부(情婦)를 두고 쾌락을 탐하기도 했습니다.
◆잉글랜드 나쁜 돈의 나라
잉글랜드는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국왕 헨리 8세가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정책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궁전을 크게 세우고,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술과 고기, 여자가 가득한 파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왕실 재정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헨리 8세에게 매일같이 국가 재정 위기 보고서가 올라오는 나날. 그가 묘안을 떠올립니다. 화폐를 생산할 때 들어가는 은의 양을 줄이라는 것. 싸구려 금속을 섞어 더 많은 은화를 생산해 왕실 빚을 갚자는 획기적인 ‘제안’(화폐주조차익·시뇨리지)이었습니다.
‘양화(良貨·Good money)’ 대신 ‘악화(惡貨·Bad money)’를 만들자는 왕의 비밀스러운 주문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합니다. 파운드화에 담긴 은의 함량이 일 년 만에 92.5%에서 33%까지 줄어든 이유였습니다.
꼼수의 유효기간은 짧습니다. 악화를 만든 대가를 치를 시간이 찾아옵니다. 앤트워프 상인들이 누구입니까. 유럽 경제를 주무르는 대가들입니다. 잉글랜드 1파운드 은화의 실질 가치가 예전 1파운드와 같지 않다는 걸 재빠르게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앤트워프 상인은 잉글랜드 화폐를 거부합니다. 그 돈의 내재가치가 ‘쓰레기’라는 걸 알고 있어서였습니다. 잉글랜드 화폐의 ‘대타락(The great debasement)’이라고 부르는 사건이었습니다.
잉글랜드가 얻은 건 잠깐의 푼돈이었습니다. 잃은 건 신뢰라는 큰 자산이었습니다. 앤트워프 상인들은 잉글랜드 왕실에 돈을 대주는 ‘전주(錢主)’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큰 이자를 요구합니다.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이유였습니다.

◆조국의 화폐 구하기에 나선 그레셤
헨리 8세가 죽었습니다. 막대한 빚을 남기고서였습니다. 그의 어린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재정문제가 제1 해결과제. 그가 처음 찾은 건 토마스 그레셤이었습니다. 런던과 앤트워프를 연결하는 ‘민간 외교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레셤은 왕 앞에서 당당하게 얘기합니다. “폐하의 가장 훌륭한 금화와 은화가 왕국 신뢰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의 직언에 임금은 역정 대신 관직을 내렸습니다. 왕의 대리인(King’s Agent)이자, 왕의 상인(Royal Merchant). 그가 다시 앤트워프로 향합니다. 조국의 신뢰를 다시 쌓기 위해서였습니다.
앤트워프에 도착한 그레셤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잉글랜드의 화폐가 다시 옛 위상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잉글랜드 정부가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상인에게, 또 은행가에게 설명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왕실의 재정 상황을 흉금을 열고 고백합니다. 높은 이자를 줄여달라는 부탁도 청했습니다. 그레셤의 노력이 통했는지 파운드화에 대한 가치가 조금씩 부활합니다. 잉글랜드 왕실의 재정 부담이 줄어들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한 지 9개월 만에 나랏빚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상인들은 다시 예전처럼 파운드화를 가지고 국제 거래에 나설 수 있게 됩니다.
1553년 잉글랜드는 다시 대혼란입니다. 에드워드 6세가 15살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누나 메리 1세가 임금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메리 1세는 전임 군주와는 달리 독실한 가톨릭 신자. 헨리 8세가 만들어놓고 에드워드 6세가 지키려 했던 개신교의 잉글랜드를 다시 뒤흔듭니다. 전임자의 라인인 그레셤이 실각한 배경입니다.
그레셤의 빈자리는 대번에 드러납니다. 메리 1세의 재정 책임자 윌리엄 던실은 그레셤의 역량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남자였습니다. 왕실 재정이 곧바로 어려워집니다. 앤트워프 상인들과 소통할 대변인도 사라져버렸습니다. 메리 1세가 다시 토머스 그레셤을 부른 이유였습니다. 잉글랜드가 메리 1세 통치 시기 종교 분쟁으로 정치적 대혼란 속에서도 국가 신용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레셤이라는 경제 거인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화폐개혁을 단행하다
다음 여왕은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 그레샴의 자리는 여전히 보장돼 있었습니다. 세 명의 군주는 모두 성향이 달랐지만 그레샴을 향한 믿음 만큼은 한결같았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에게 전폭적인 권한을 부여합니다. 그레샴은 믿음을 기반으로 대대적인 화폐개혁을 단행합니다.
나쁜 돈과 동의어가 되어버린 파운드화를 다시 좋은 돈으로 돌려놓자는 고언이었습니다. 화폐의 질이 국가의 신뢰를 결정한다는 걸 알아서였습니다. 대규모 화폐 교체 작업이 수반됩니다. 잉글랜드는 다시 부국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네덜란드에서 전쟁이 터집니다.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참지 못하겠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앤트워프의 은행가들과 상인들이 대거 잉글랜드로 피난 옵니다. 그레샴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런던을 제2의 앤트워프로 만들자는 구상. 유럽의 자본과 상인들이 뛰어놀 마당을 조국에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왕립거래소(Royal Exchange)의 탄생이었습니다.
왕립거래소는 훗날 주식이 거래되는 런던증권거래소의 모태가 됩니다. 세계 금융 중심지의 초기 모델에 그레셤의 흔적이 남았다는 의미입니다. 잉글랜드를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숨은 조력자로 그레셤이 빠지지 않는 이유기도 합니다.
1579년 그레셤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재산 대부분을 대학 설립에 사용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아내 앤 퍼넬리가 전 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이 유산을 되찾기 위해 소송을 건 배경이었습니다. 토마스 그레셤은 공적으로는 애국자였지만, 가정에서 만큼은 죽어서까지 폭군으로 남았습니다.
그레셤은 ‘글로벌 금융의 첫 번째 마법사’로 불립니다. 탁월한 재정 감각으로 조국의 곳간을 채웠기 때문입니다. 혁신적 화폐정책으로 잉글랜드의 국제적 위상을 부활시켰기 때문입니다. 정치인보다 뛰어난 감각, 군주보다 원대한 포부를 가진 위대한 상인이었습니다. 잔혹한 남편이었고, 제국을 만든 위대한 경제인이었으며, 무엇보다 뜨거운 애국자였던 한 남자. 런던을 넘어 대영제국의 초석을 다졌던 사내. 토마스 그레셤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