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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남자를 찾아간 20대 여성…비명소리가 울려퍼지며 세상이 시끄러워졌다 [사색(史色)]

  • 강영운
  • 기사입력:2025.05.27 13:00:00
  • 최종수정:2025-06-01 10: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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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96] 습기로 가득한 욕실. 50세 중년 남자가 나른한 표정으로 욕조에 몸을 담급니다. 건강 걱정, 나라 걱정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누군가 욕실 문을 두들깁니다. “들어오세요.” 처음 보는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에는 윤기가 흐르고, 눈에는 총기가 가득합니다.

50세 나신의 남자를 찾은 묘령의 여성. 욕실의 증기에 어쩐지 야릇한 기운이 감돕니다. 문 닫힌 욕실에서는 두 사람 대화만 나지막이 들려옵니다. 첨벙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이윽고 들려오는 남자의 비명소리. 놀란 사람들이 욕실 문을 열자, 욕조에는 선홍빛 핏물 가득합니다. 남자는 가슴에 피를 흘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젊은 여성은 누구보다 당당합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년 작품.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년 작품.

욕실에서 테러를 당한 남자의 이름은 장 폴 마라. 프랑스 혁명 당시 급진파의 거두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프랑스 정치를 더욱 혼란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그림인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마라가 흘린 핏물은 프랑스 전역을 물들인 촉매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갈등이 폭발하는 이 시기, 그날의 흔적과 기억을 쫓습니다.

“아저씨, 정치 그렇게 하면 안돼요.” 후대 노르웨이 화가 뭉크도 ‘마라의 죽음’을 본인의 화풍으로 재해석했다.
“아저씨, 정치 그렇게 하면 안돼요.” 후대 노르웨이 화가 뭉크도 ‘마라의 죽음’을 본인의 화풍으로 재해석했다.

급진파의 거두 ‘장 폴 마라’

장 폴 마라. 그의 별명은 ‘민중의 벗’이었습니다. 민중의 고혈을 뽑아먹는 고관대직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기, 혁명의 기수였던 장 폴 마라. 루이 16세의 체제를 뒤엎어버리겠다는 프랑스 시민들의 결기는 대단합니다. 프랑스 절대주의 왕정은 시민들의 분노 앞에선 모래성과 같았습니다.

혁명이라고 옷을 입고 있었지만, 조직은 여러 갈래로 찢겨 있었습니다. “왕정은 안된다”는 목표만 공유할 뿐 각자 방향성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루이 16세 처형문제부터, 혁명의 속도, 정책 방향까지 모든 방면에서 의견이 엇갈립니다.

프랑스 혁명의 극단성을 주도한 몽타냐파를 묘사한 그림.
프랑스 혁명의 극단성을 주도한 몽타냐파를 묘사한 그림.

극단적 급진파인 몽타뉴파와 온건파인 지롱드파의 대립이 주였습니다. 혁명 직후 개설된 국민 제헌의회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었던 몽타뉴파(산의 사람들)가 급진화를 주도합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혁명의 완성’을 주장합니다. 더디 갈수록 왕정주의자들이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로베스피에르, 장 폴 마라였지요.

“혁명이 무슨 오뚜기 3분 카레도 아니고~” 온건한 정치 개혁파 지롱드의 마지막 식사. 프랑수아 플라멩의 1850년 작품.
“혁명이 무슨 오뚜기 3분 카레도 아니고~” 온건한 정치 개혁파 지롱드의 마지막 식사. 프랑수아 플라멩의 1850년 작품.

민중의 친구, 혁명의 기수 장 폴 마라

장 폴 마라의 별명은 ‘피의 사나이(sanguinaire)’였습니다. 세상을 뒤엎기 위해서 극단적인 폭력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상류 계급만이 먹잇감이 아니었습니다. 점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장 폴 마라에게는 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에겐 오직 힘을 동원한 폭력적 혁명만이 세상을 뒤엎을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속도를 늦추자는 놈들도 혁명의 적이지.” 장 폴 마라의 초상화.
“속도를 늦추자는 놈들도 혁명의 적이지.” 장 폴 마라의 초상화.

혁명의 속도 조절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도 가차 없었습니다. 그가 단두대에 올린 건 왕정주의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온건파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그가 한 때 동지라고 부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혁명 기간 그는 파리의 하수도에서 몇 날 며칠을 숨어 지내야 하는 고난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쥐와 쓰레기로 가득한 공간에서 지내면서 피부에 딱지가 덕지덕지 앉았지만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직접 발행한 신문 ‘인민의벗’(L‘Ami du Peuple)에서 마라는 얘기합니다. “(반대파의) 머리를 베어 그들의 검은 죄악을 피로 씻어내자.” 누군가가 지나친 숙청을 우려하면 그는 목에 핏대를 세웠습니다. “그들을 1000명 죽이는 것이 1000만명의 민중을 살리는 것”이라고.

“마오이즘 이전에 마라이즘이 있었다지.” 루이 레오폴드 부일리의 ‘마라의 승리’. 1794년 작품.
“마오이즘 이전에 마라이즘이 있었다지.” 루이 레오폴드 부일리의 ‘마라의 승리’. 1794년 작품.

극단화된 혁명, 불안해지는 정치

고성(高聲)은 언제나 이성(理性)을 구축(내쫓다)하기 마련입니다. 정치에서는 특히나 그렇습니다. 로베스피에르와 장 폴 마라의 극단적 메시지를 민중들은 가슴에 품었습니다. 뼈에 새겼습니다. 파리 시내에서 왕당파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향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됩니다. 1792년 9월이었습니다. 9월 학살이라고 부르는 사건이었습니다.

“혁명 반대파는 이렇게 요리해 먹는 거라고.” 영국 풍자화가 제임스 길레이가 그린 프랑스 9월 학살을 풍자한 그림. 적국에서의 혁명이었기에 더욱 신랄하게 묘사된 측면이 있다.
“혁명 반대파는 이렇게 요리해 먹는 거라고.” 영국 풍자화가 제임스 길레이가 그린 프랑스 9월 학살을 풍자한 그림. 적국에서의 혁명이었기에 더욱 신랄하게 묘사된 측면이 있다.

왕당파와 프로이센 군대가 프랑스 혁명의 파고를 막으러 진군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들의 공포심을 부른 배경이었습니다. 희생자에는 어린이와 여성도 포함돼 있었지만, 홍위병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죽은 이들 모두가 혁명의 적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혁명의 지도자들이 살인에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장 폴 마라는 한발 더 나아갑니다. “국민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무장한 뒤 반역자들을 칼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혁명에 핏자국이 선명해질수록 불안은 커집니다. 더 많은 피가 혁명의 정신을 오염시킨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였습니다. 극단과 폭력을 배제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질서 있는 민주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규모도 커집니다. 와인 생산지로서 부유함과 넉넉함을 자랑하던 도시, 보르도의 지롱드에서 온 사람들 중심으로 온건한 사람들이 세력을 규합합니다. ‘지롱드파’였습니다.

“세상엔 매운 게 세가지 있다네. 불닭볶음면, 마라탕, 그리고 장 폴 마라. ” 9월 학살을 묘사한 그림.
“세상엔 매운 게 세가지 있다네. 불닭볶음면, 마라탕, 그리고 장 폴 마라. ” 9월 학살을 묘사한 그림.

젊은 코르데이, 장 폴 마라에 분노하다

하급 귀족 출신 젊은 여성 샬롯 코르데이. 철학과 정치에 관심이 많던 그녀는 혁명의 목적에 공감합니다. 방법론에 있어서는 온건한 지롱드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의견이 다르다고 칼부터 들이미는 그악스러운 몽타뉴파에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느껴서였습니다. 1792년 9월 대규모 학살이 벌어지고, 이듬해 1월 루이 16세의 목이 잘렸습니다. 코르데이는 생각했습니다. 혁명의 정신이 오염되고 있다고, 그들은 그저 피에 굶주린 살인귀로 변했다고.

“매운 맛에 중독된 사람들을 위해 더 이상 마라를 용서할 수 없어.” 1793년 캉에서 샬롯 코르데이. 화가 토니 로버트 플뢰르가 그린 그림.
“매운 맛에 중독된 사람들을 위해 더 이상 마라를 용서할 수 없어.” 1793년 캉에서 샬롯 코르데이. 화가 토니 로버트 플뢰르가 그린 그림.

샬롯 코르데이가 살던 마을에 귀한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지롱드파’였습니다. 장 폴 마라를 비롯한 극단파들이 루이 16세의 사형에 반대한 의원들을 숙청하자 도망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녀가 평소에 존경해 마지않던 정치인들을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던 기회. 코르데이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롱드파의 이념에 공감해서, 몽타뉴파의 폭력성에 경악해서.

그녀는 생각합니다. “10만명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 그녀에게 혁명의 적은 루이 16세와 같은 왕족이 아니었습니다. 폭력과 피에 굶주린 극단파였습니다. 그 수뇌부 장 폴 마라였습니다.

“이게 모두 민중을 위한 것이지.” 장 폴 마라의 초상화.
“이게 모두 민중을 위한 것이지.” 장 폴 마라의 초상화.

적의 욕실에 들어가다

“도망친 적 지롱드파의 위치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봉기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장 폴 마라에게 편지가 도착합니다. 도망친 정적들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첩보였습니다. 혁명 정부에 반해 봉기를 일으키려 한다는 계획까지 적혀 있습니다. 장 폴 마라는 오랜 도피생활로 인한 피부 질환때문에 집을 나갈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온종일 욕조에 몸을 담그고 업무를 볼 정도였습니다. 몸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혁명 정부가 다시 무너질 위기. 욕조에서라도 제보자를 만나야 했습니다.

“당신은 혁명의 적이야, 장 폴 마라.” 샬롯 코르데이.
“당신은 혁명의 적이야, 장 폴 마라.” 샬롯 코르데이.

1793년 7월 13일. 저녁 7시. 파리. 한 마차에서 젊은 여인이 내립니다. 샬롯 코르데이였습니다. 한 저택의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립니다. 안내인이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녀를 욕조로 안내합니다. 문을 열자 머리에 두건을 두른 초췌한 중년의 남성이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잠시 미소를 짓습니다. 장 폴 마라가 눈 앞에 있어서였습니다.

종이를 꺼내 건넵니다. 그의 눈길이 종이에 멈춘 사이, 그의 가슴팍에 무언가가 꽂힙니다. 칼이었습니다. “도와줘”라는 짧은 비명과 함께 숨을 거뒀습니다. 민중의 친구이자, 피의 사제라고 불렸던 사나이 장 폴 마라의 죽음.

“내가 죽인 건 혁명가가 아니었소, 피에 굶주린 악마였소.” 폴 보드리의 1860년 작품.
“내가 죽인 건 혁명가가 아니었소, 피에 굶주린 악마였소.” 폴 보드리의 1860년 작품.
“저 여자가, 우리의 영웅을 죽였다.” 장 요세프 위르츠의 1860년 작품.
“저 여자가, 우리의 영웅을 죽였다.” 장 요세프 위르츠의 1860년 작품.

피의 보복이 시작되다

3일 후 광장의 단두대에 모인 시민들의 표정에는 분노가 서려 있습니다. 샬롯 코르데이가 형장으로 끌려나온 직후였습니다. “당장 저년을 죽여라”는 고함이 가득합니다. 그녀의 표정은 차분했습니다. 목적을 이뤘기 때문이었을까요. 프랑스의 평화가 찾아올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을까요.

목에서 분리된 몸뚱이를 혁명 정부가 수거해갑니다. ‘처녀성 검사’를 위해서였습니다. 장 폴 마라를 죽인 여자가 ‘문란한 창녀’와 같은 여인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부의 눈에 들어온 건 명백한 ‘처녀성’이었습니다.

“나는 더러운 창녀가 아니라,  프랑스를 위한 애국자다.” 샬롯 코르데이의 처형.
“나는 더러운 창녀가 아니라, 프랑스를 위한 애국자다.” 샬롯 코르데이의 처형.

샬롯 코르데이의 대의와는 달리 현실은 정확히 정반대로 움직입니다. 장 폴 마라에 대한 ‘신성화’ 작업이 시작되면서였습니다. 동지 로베스피에르는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그의 죽음을 묘사할 그림을 주문합니다. 그림 속 다비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예수가 인간을 위해 죽었듯, 마라는 혁명을 위해 죽었습니다. 그의 몸에 흉측하게 수 놓여 있던 피부병의 흔적조차 모두 사라집니다.

피마저도 성스롭고 고요합니다. 혁명정부는 ‘국장’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국민 제헌의회에서는 추도사가 낭독됩니다. “예수처럼 마라는 오직 민중만을 사랑했습니다. 예수처럼 마라는 왕, 귀족, 사제, 사기꾼을 미워했으며, 예수처럼 그는 민중의 재앙에 맞서 싸우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낭독자는 변태 성욕으로 이름을 남긴 사드 후작이었습니다).

마라의 죽음은 여러 화가들에 의해 그려짐으로써 신성화 됐다. 피부병을 앓던 그의 피부 역시 깨끗한 순교자처럼 묘사된다. 사진은 기욤 요세프 로크스의 작품.
마라의 죽음은 여러 화가들에 의해 그려짐으로써 신성화 됐다. 피부병을 앓던 그의 피부 역시 깨끗한 순교자처럼 묘사된다. 사진은 기욤 요세프 로크스의 작품.

분노가 정치의 동력이 될 때

겉으로는 순수한 추모였으나, 속으로는 정치적 목적이 가득합니다. 시민들의 애달픈 감정을 정치적 에너지로 폭발시킵니다.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의 권력은 최절정에 달합니다. 로베스피에르를 절대 권력으로 치켜세운 국민 제헌의회는 선언합니다. “공포가 오늘의 질서입니다.”

반혁명 의심자는 오직 혐의만으로 체포, 구금됩니다. 수십만명이 체포되고, 1만 7000명이 처형됩니다. 혁명 정부에 대한 반대는 금지됩니다. 연대의 자리에는 불신이 싹틉니다. 민중은 이제 불안이라는 이불을 덮고 삽니다. 샬롯 코르데이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고, 혁명이 꿈꾸던 이상과도 달랐습니다.

마라가 암살 당했을 당시 읽고 있던  ‘민중의 친구’. 마라가 발행한 신문에 그의 피가 묻어 있다.
마라가 암살 당했을 당시 읽고 있던 ‘민중의 친구’. 마라가 발행한 신문에 그의 피가 묻어 있다.

공포는 통제의 원리이지, 통치의 원칙일 수 없습니다. 로베스피에르를 앞세운 극단파들을 향한 저항이 일어납니다. 테르미도르 반동이었습니다. 더 이상 극단파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혁명의 키는 이제 온건파의 손에 넘어갑니다. 지지부진한 혁명, 엉망인 경제, 계속되는 비루한 삶. 그 불안을 먹고 정권을 잡은 이, 나폴레옹이었습니다. 극단의 끝, 그리고 다시 극단의 시작. 비극의 영원회귀였습니다. 분노를 정치 동력으로 삼은 대가였습니다.

“내가 이제 프랑스를 지배하겠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수아 부쇼의 그림.
“내가 이제 프랑스를 지배하겠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수아 부쇼의 그림.
프랑스 혁명 당시 극단적인 정치를 이끈 세 사람. 로베스피에르, 단통, 마라. 알프레드 라우데의 1882년 작품.
프랑스 혁명 당시 극단적인 정치를 이끈 세 사람. 로베스피에르, 단통, 마라. 알프레드 라우데의 1882년 작품.

<네줄요약>

ㅇ프랑스 혁명 당시 장 폴 마라는 ‘죽음과 폭력’을 옹호하는 급진파의 거두였다.

ㅇ급진파가 왕당파 뿐만 아니라 온건파까지 숙청하자, 혁명 조직간 내분이 일었다.

ㅇ온건파에 동조했던 20대 여성 샬롯 코르데이가 장 폴 마라를 욕실에서 암살한 배경이었다.

ㅇ샬롯의 의도와는 달리 장 폴 마라를 향한 신성화 작업이 완성되면서 혁명의 정신은 오염됐고, 나폴레옹 체제로 귀결됐다.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격주 주말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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