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 고수들은 큰 시합 후 반드시 복기를 한다. 자신과 상대방의 수를 다시 두면서 승패의 원인을 파악하고 미래를 도모하려는 목적이다. 우리나라도 최근 '트럼프와의 협상'이라는 큰일을 치렀다. 복기를 해 볼 시점이다.
과정은 험난했다. 미국과의 무역협상은 2024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부터 시작됐다. 유럽·일본·캐나다 등 각국이 줄을 서서 트럼프를 만났다.
그 줄에 한국은 없었다. 불법 계엄과 대통령 탄핵으로 6개월 넘게 대미 외교는 사실상 중단됐다. 국가 명운이 걸린 협상에서 트럼프를 설득할 최적의 시기를 놓쳤고 정쟁으로 국론은 분열됐다. 막판 초읽기에 몰려 시간도 모자랐다.
과정에 비하면 결과는 선방했다. 트럼프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협상이라 각국은 운신의 폭이 좁았다. '도토리 키 재기' 같은 비교지만 일본·유럽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이재명 정부 출범 후 한미 관계가 다소 불안하다는 염려가 있었지만 이번 협상을 계기로 대미 외교라인을 정상화한 것도 성과다.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외환시장 문제다. 유럽·일본은 기축통화국이라 외환시장에 대한 걱정은 없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트럼프와 합의한 3500억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고, 미국산 에너지 1000억달러어치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달러 수요는 급증한다. 한국 외환보유액이 4100억달러, 외환시장 일평균 거래량이 120억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협상 이행 과정이 시장에 충격을 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달러 수요가 단기간에 급속히 늘어나면 원화값은 하락하고 환율은 치솟는다. 이럴 때 투기자본까지 가세한다면 외환시장은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은 외환시장이 혼란에 빠지면 실물경제도 타격을 입는다. 유럽과 일본은 아무리 많은 달러를 미국에 투자한다고 해도 유로화나 엔화값이 요동칠 가능성은 별로 없다.
미국에서 비롯된 시장 불안은 미국과의 합의로 풀어야 한다. 우선 현재 중단된 한미 중앙은행 간 통화스왑 협정을 부활시켜 필요할 때 원화와 달러를 교환해 대처함으로써 시장 불안을 잠재워야 한다. 또 한국이 달러 유동성이 부족할 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즉각 달러 대출을 해줄 것을 명문화하는 협약도 필요하다.
이런 아이디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트럼프의 경제 책사인 스티븐 마이런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이 지난해 내놓은 '마이런 보고서'에서 제시됐다. 그는 미국이 재정적자와 무역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구채를 발행해 다른 나라에 떠안기는 안을 내놨다. 이어 이 안을 받아들인 국가에는 연준이 통화스왑 계약이나 달러 대출을 통해 달러 유동성을 제공해 주는 것을 당근으로 제시할 수 있다고 썼다.
한국 입장에서 3500억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고 투자수익금의 90%를 미국 내에 유보하는 것은 사실상 미국 영구채를 사는 것과 비슷한 행위다. 우리가 보유한 달러를 우리 마음대로 운용할 수 없다면 통화스왑과 달러 대출을 통해 외환시장 안정을 도모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요구다.
외환시장 안정은 한미 모두에 도움이 된다. 외환시장에서 달러 부족으로 원화값이 폭락하면 한국 수출품의 가격이 떨어져 대미 수출이 늘어난다. 이는 미국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한국은 미국의 고율 관세로 수출이 줄면 하반기 경기에 악영향을 미친다. 이때 한국은행이 금리 인하 등 경기 부양 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외환시장 안정이 필수적이다.
한미 통화스왑 복원은 트럼프와의 협상 내용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앞으로 있을 한미 정상회담이나 무역협상 후속 논의 과정에서 관철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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