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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파월에게 남은 길

권력은 늘 금리 인하 유혹 빠져
'인플레 파이터' 중앙銀과 충돌
트럼프도 연일 美 연준 흔들기
금리 결정에 정치 개입 안될 일
잇단 실기론 비판 시달린 파월
독립성 지키는 게 마지막 사명

  • 임성현
  • 기사입력:2025.07.28 17:42:46
  • 최종수정:2025.07.28 17: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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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열린 유럽중앙은행(ECB) 주최 포럼에서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난데없는 박수 세례를 받았다. 자신을 흔들어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박에 "저는 제 일에만 100% 집중한다"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자 청중이 보낸 응원이다. 옆에 있던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도 "(같은 입장이라면) 파월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거들었다. 저마다 다른 경제 상황에서 각국에 맞는 최적의 통화정책을 고민하는 중앙은행 수장들이 동병상련으로 공감대를 이룬 것이다.

연준이 지금처럼 독립적인 통화정책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1951년 재무부와 맺은 협약부터다. 발단도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연준 의장들 간 갈등이다. 전후 막대한 정부 부채의 이자 비용을 낮추려던 트루먼 대통령은 저금리 요청을 거부한 토머스 매케이브 의장과 충돌하다 급기야 그를 해고한다. 뒤이어 기대와 달리 강력한 매파정책을 편 윌리엄 마틴 의장과도 내내 얼굴을 붉혔다.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아서 번스 의장,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폴 볼커 의장도 대립했다.

한국도 지금처럼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보장된 게 불과 30년도 안 됐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1998년 개정 한국은행법이 시행되면서다. 그전까지 한은은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로 불렸다. 이후에도 이명박 정부 시절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은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며 이성태 한은 총재를 압박했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지난해 8월 한은이 금리를 13차례 연속 동결하자 당시 용산 대통령실은 이례적으로 "아쉽다"는 발표로 이창용 한은 총재를 겨냥했다.

정치 권력은 늘 금리 인하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누적 국가 부채가 36조9000억달러(약 5경원)에 달하는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대규모 감세법을 밀어붙였다. 뒤치다꺼리는 연준의 금리 인하로 국채 이자를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파월 의장과 연준을 '집단린치'에 가까울 만큼 몰아붙이는 이유다.

30일(현지시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금리가 시장 예상대로 동결되면 트럼프 대통령은 파월 의장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파월 의장의 승리도 아니다. 금리 결정은 게임도 아니고 정치가 개입해선 더더욱 안 되는 영역이다.

파월 의장이 내년 5월까지 임기를 채우더라도 후임 의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금리를 인하하는 인사를 앉히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시장엔 벌써부터 미국채 단기물을 사고, 장기물을 파는 '파월 헤지'가 횡행한다. 장기적으로 물가가 안정될 것이란 믿음이 사라진 시장은 기대인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을 밀어 올리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정권과 갈등하면서도 최장 기간 재임하며 현대적 중앙은행의 초석을 마련한 마틴은 중앙은행의 역할을 "파티가 한창 무르익을 때 펀치볼을 치우는 역할"이라고 표현했다. 모두가 호황에 취했을 때 누군가는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 찬물을 끼얹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월 의장은 2021년 물가 상승기엔 금리 인상을, 2024년 경기 침체기엔 금리 인하에 실기했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아마도 파월은 마틴은 물론 볼커나 앨런 그린스펀 같은 '명장'의 반열엔 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만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권력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모습만은 보여줘야 할 것이다.

[임성현 뉴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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