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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헌철칼럼] 주권자의 시간, 권력자의 시간

21대 대통령 누가 되더라도
갈라진 사회, 뒤처진 경쟁력
단숨에 해결하는 건 불가능
과거정부 반면교사가 출발점

  • 신헌철
  • 기사입력:2025.05.28 17:24:05
  • 최종수정:2025.05.28 17: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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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대선 사전투표가 시작됐다. 기표소 안에 홀로 들어서면 스스로 주권자임을 체감한다.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나면 국민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다시 권력자의 시간이 온다.

12·3 비상계엄으로 시작된 혼돈은 새 정부 탄생과 함께 일단락될 것이다. 지난 6개월 동안 국민은 어두운 방 안에서 각자의 촛불을 켰다. 민주주의와 국가의 역할을 되묻는 성찰의 시간이었다. 그 끝에서 선거 이후 펼쳐질 세상을 조심스럽게 내다보고 있다.

선거는 흔히 구도와 바람에 좌우된다고 한다. 두 가지 변수 모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보수 진영이 분열된 3자 구도가 유지됐고, 국민의힘은 바람의 방향을 바꿀 묘수를 찾지 못했다.

선거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여론조사 흐름은 이재명 후보의 당선을 가리키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탄생한다면 어떤 세상이 열릴 것인가. 국민의힘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모두 장악한 '거대 정권'의 독주를 우려한다. 반면 민주당은 절제된 권력 사용과 실용적 개혁을 약속하고 있다. 김문수·이준석 후보가 대역전에 성공하려면 구도와 바람이 완벽히 결합해야 하지만 기회의 창은 좁아져 있다.

누가 승리하든 새 정부의 성공은 이전 정부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윤석열 정권의 실패는 대통령 개인의 자질 문제만은 아니었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국정운영 로드맵이 부실했다.

터지는 현안을 두더지 게임을 하듯 수습하다가 시간을 흘려보냈다. 흐름을 바꾸기 위한 시도는 오히려 악수가 됐다. 예컨대 의대 증원과 같은 정책은 필요했지만 시기와 방식이 어긋났다. 지지율 하락은 총선 대패로 이어졌고, 정권 운영의 동력을 잃었다.

지지율은 본래 모래성과 같다. 이재명 후보의 현재 지지율에도 최소 10% 이상 '비판적 지지'가 포함돼 있다고 본다. 이 후보 지지율은 계엄 이후에도 한동안 30%대 초반 박스권에 갇혀 있었다. 대선에서 얻은 득표율을 절대적 지지로 인식할 수 없다는 얘기다.

나라 밖에서도 한국의 위기를 말한다. 엊그제 파이낸셜타임스(FT) 아시아판은 한 페이지에 걸쳐 '압력받는 한국'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도널드 트럼프를 가운데 두고 양옆에 김정은과 이재명의 얼굴을 넣었다. 한미동맹은 '조용한 위기'였으나 더 이상 조용하지 않을 것이란 빅터 차 CSIS 한국석좌의 경고가 눈에 들어왔다.

외교 문제뿐일까. 분열된 사회, 산업 경쟁력 약화, 구조적 저성장 등 무거운 과제가 산적해 있다. 계엄 이후 반년 동안 국가 기능은 멈춰 있었다. 새 정부는 세상을 빨리 바로잡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일거에 문제를 해소할 방법은 없다. 어떤 대통령도 단숨에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낼 메시아가 될 수는 없다.

1516년 토머스 모어는 소설 '유토피아'를 세상에 내놓았다. 유토피아는 애초 대륙과 맞닿은 반도였지만, 새로운 지도자가 육지와 통로를 끊고 섬으로 만들었다. 자유보다 평등을,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풍요롭고 안전한 사회다. 모든 시민이 노동을 해야 하지만, 하루 6시간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유토피아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뜻한다.

지금 한국에는 이상향을 실험할 시간도, 공간도 없다. 소득주도성장, 적폐 청산, 종전 선언, 임대차 3법을 앞머리에 뒀던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목도했다.

개개인의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안정감을 주는 정부, 구조적 비효율을 찾아내 차근차근 개선하는 정부, 그러나 민간의 역량을 훼손하지 않는 정부.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최선이다.

[신헌철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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