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본다고 바티칸 오지 말고 그 돈 기부하라”
동성애자 환대, 성직자 아동 성추행 문제 사과도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은 축복받을 수 있다. 이혼한 사람,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축복받을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직접 집필한 자서전 ‘희망’에서 이같이 적었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꿈꿨던 그는, 시대의 저항 앞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으며 역대 교황 중 가장 진보적 인물로 평가받아왔다. 그가 21일(현지 시간) 선종하면서 14억 가톨릭 신자를 비롯한 전 세계가 깊은 슬픔에 잠겼다.

88세를 일기로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일하던 양말공장에서 청소와 사무보조를 맡았다. 공업학교에 진학해 오전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오후엔 학교에서 식품화학을 공부했다. 소박한 삶과 검소한 정신은 이 시절부터 그의 삶에 스며들었다.
본래 화학 기술자가 되려고 했으나, 17세 때 산호세 플로레스 성당의 고백실에서 신의 부름을 받고 성직자의 길을 결심해 1969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어 1980년 산미겔 예수회 수도원 원장을 거쳐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 2001년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2013년 3월 13일 그는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첫 아메리카 대륙 출신 교황이자 첫 예수회 출신 교황,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사용한 첫 교황이었다.
그가 택한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은 ‘빈자들의 친구’라는 의미다. 13세기 초 청빈한 삶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신으로 존경받았던 이탈리아 아씨시의 성(聖)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따랐다.
이름만큼이나 삶도 검소했다. 2002년 아르헨티나 외환 위기 당시 아르헨티나 대주교였던 그는 시내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저녁을 직접 요리하며 생활했다. 운전사가 모는 리무진 대신 도보나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2001년 추기경으로 임명된 후에도 그는 아르헨티나 신도들을 향해 “내가 추기경으로 임명된 것을 기념한다고 로마에 오지 말고 여행에 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라”고 당부했다. 교황 선출 후에도 자국 신도들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교황은 보수적 전통이 강한 가톨릭계에서 파격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2013년 교황은 “동성애자가 선한 의지로 신을 찾는다면 누가 그를 심판할 수 있겠느냐”고 말해 보수층의 반발을 샀지만, 동성애 커플을 축복할 수 있게 허용하는 등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여성을 처음으로 교황청 장관에 임명했고 낙태·재혼자에 대한 성체성사를 허용하는 등 진보적 입장을 견지해왔다.
가톨릭 교회가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성직자의 아동 성추행 문제에도 정면으로 맞섰다. 2018년 칠레 방문 중에는 아동 성추행 피해자에게 공개 사과하며 “일부 사제가 어린 생명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힌 데 대해 고통과 수치심을 느낀다. 내가 문제의 일부였다”고 고백했다. 2021년에는 ‘미성년자 성범죄 성직자 무관용’을 명시한 개정 교회법을 반포했다.

교황은 한국에도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2014년 8월 아시아 첫 방문지로 한국을 찾아 세월호 참사 유족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을 위로했다. 언제나 신자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자 했던 교황은 묵직한 방탄 차량이 아닌 기아 소형차 ‘소울’을 타고 움직였다.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전세기에서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인간의 고통 앞에 서게 되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답했다.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 때는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주일 기도 중에 “어젯밤 서울에서 갑작스러운 압사 사고로 인해 비극적으로 숨진 많은 희생자, 특히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언급했고, 지난해 12월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당시엔 “비극적인 비행기 추락 사고로 슬퍼하는 한국의 많은 가족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올해 봄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산불이 확산되자 위로의 뜻을 표하는 등 그는 한국 사회의 아픔을 공유해왔다.
재임 기간 내내 세계 평화를 위한 역할에도 힘썼다. 2015년 적대적 관계에 있던 미국과 쿠바 국교 정상화에 결정적 기여를 했고 2017년에는 로힝야족 추방으로 ‘인종청소’ 논란이 불거진 미얀마를 찾아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2000년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2021년 이라크 땅을 밟아 무장테러 희생자를 위로하기도 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023년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에도 지속적으로 민간인 피해 중단과 평화 회복을 호소했다.

하지만 교황은 최근 2년간 건강이 악화되면서 입원과 치료를 반복해야 했다. 지난 2월 폐렴 진단을 받은 그는 입원 후에도 호흡 곤란 증세로 고용량 산소 치료를 받았고 혈소판 감소증과 빈혈로 수혈받기도 했다. 입원 중 상태가 악화하기도 했지만 지난 3월 23일 38일간의 입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했다.
회복 중이었던 교황은 20일 부활절 야외 미사에 깜짝 등장해 신도들을 축복했다. 교황은 대독 메시지에서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의 휴전과 인질 석방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날 모습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언을 통해 화려한 장례 대신 조용한 안식을 택했다. 자신이 생전에 애착을 보였던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성 마리아 대성당)에 장식 없이 이름만 적힌 묘비 아래 안식하기를 요청하며 끝까지 청빈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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