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5.08 21:00:00
비교 열위 후발 주자…틈새 공략해 역전 SK하이닉스·구다이…업계 서열 바꾸다
최근 ‘조선미녀’로 유명한 구다이글로벌이 뷰티 업계 ‘빅2’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을 영업이익 면에서 제쳐 화제가 됐다. 게임 업계 후발 주자인 크래프톤, 시프트업이 ‘전통의 강호’ 3N(넥슨, 넷마블, NC소프트)을 실적에서 추월하거나 위협한다. 반도체, 유통, 식품 등 업계 전반에서 ‘언더독(Underdog)’으로 불리는 후발 주자가 기존 강자와 순위를 뒤바꾸며 시장을 재편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자본, 인력 면에서 열세였던 이들의 역전 현상은 단순한 이변이 아니라 경영학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시사점을 던진다.
언더독.
경영학에서 자원, 규모, 브랜드 인지도 면에서 선발 주자(Top Dog)에 비해 열위에 있는 기업을 뜻한다. 이들의 성공은 종종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교수가 주창한 ‘파괴적 혁신’ 이론으로 설명된다. 언더독은 저가 모델이나 새로운 가치 제안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해 점차 주류 시장을 잠식한다. 저가커피(컴포즈·메가MGC)가 영업이익 면에서 투썸플레이스를 제친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자본과 인력 등이 대기업 대비 열악하지만 ‘선택과 집중’을 한 끝에 승기를 잡은 사례도 있다. 중소기업으로 치부되던 게임 회사 ‘시프트업’이 소수 정예 개발로 높은 수익을 올리며 종전 대기업 대비 영업이익에서 앞선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김석집 네모파트너즈POC 대표는 “ ‘자원기반관점(RBV)’ 학설 중 ‘제한된 자원은 오히려 핵심 역량 집중과 효율성 극대화로 이어진다’는 공식을 지켰을 때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며 “시프트업의 경우 독특한 내부 역량을 경쟁 우위로 전환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언더독의 가장 큰 무기는 ‘민첩성’이다. 대기업이 ‘규모의 저주’나 ‘대기업병’이라 불리는 관료주의와 의사결정 지연으로 변화 대응에 둔감한 사이 언더독은 빠른 판단과 실행으로 기회를 포착한다.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앞선 것은 데이비드 티스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강조한 ‘동태적 역량’, 즉 시장 변화에 맞춰 자원을 신속히 재구성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이들은 소비자의 숨겨진 요구를 파고들거나 시장 자체를 재정의하기도 한다. 삼양식품 ‘불닭볶음면’의 성공은 기존 라면 시장의 문법을 깨고 K푸드와 소셜미디어 트렌드를 활용해 새로운 글로벌 수요를 창출한 예로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언더독의 선전은 보수적인 재계에 ‘동태적 경쟁’을 촉진하는 강한 자극제라 할 수 있다.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의 경쟁이론 관점에서도 이는 신규 진입자와 대체재의 위협이 현실화된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기존 강자에게 끊임없는 혁신을 요구하고, 소비자에게는 더 나은 가치를 제공하며 산업 전체의 활력을 높인다.
추월 허용 배경엔 ‘대기업병’
언더독, 빈틈 파고들었다
최근 산업계에 부는 ‘언더독 돌풍’은 아이러니하게 기존 강자들이 앓아온 ‘대기업병’의 민낯을 보여준다는 진단이다.
대기업의 대표적인 병폐는 ‘관료 화석화’다. 길게 늘어선 보고 체계와 여러 부서를 거치는 더딘 업무 처리는 급변하는 시장에 대한 대응 속도를 크게 떨어뜨린다. 이영민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내부 합의에 드는 비용과 시간이 늘어나 비효율성이 커진다”며 “덩치 큰 공룡이 둔하다는 말처럼 조직 비대가 오히려 장점을 가리는 순간이 온다”고 지적했다.
‘2년 안에 손익분기점(BEP) 달성’ 같은 단기 목표 중심 경영(KPI) 역시 혁신의 싹을 잘라낸다. 당장 숫자로 성과를 증명하기 어려운 창의적 아이디어나 장기 투자가 필요한 프로젝트는 조직 안에서 외면받기 십상이다. 반면 언더독 기업은 다르게 접근한다. SK하이닉스가 연구개발(R&D) 예산의 3%를 ‘실패 예산’으로 따로 둬, 실패하더라도 장기적인 실험과 도전을 뒷받침하는 것이 좋은 예다.
과거 성공 방식에만 매달리는 ‘유통·브랜드 채널 고착화’ 역시 대기업의 발목을 잡는 고질병이다. 농심, 롯데쇼핑 같은 전통 강자들은 기존 오프라인 유통망이나 막강한 브랜드 파워를 지키는 데 힘쓰다 온라인과 소셜미디어(SNS) 중심으로 빠르게 바뀌는 소비 흐름과 글로벌 시장 변화의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평가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이제 온라인이 주요 소통 창구가 되면서 정보가 어느 때보다 빠르게 퍼지고 모든 것이 공유되는 시대”라며 “쿠팡은 온라인 쇼핑이 대세가 된 흐름을 잘 읽었고, 대전의 성심당 역시 SNS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인 빵집이 됐다. 이런 시대 변화에 잘 발맞춘 기업이 승자가 됐다”고 설명했다.
왕좌는 영원하지 않다
언더독도 끊임없이 혁신해야
약진하는 후발 기업 입장에서도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현재의 언더독 역시 영원한 승자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이영민 교수는 “오늘의 언더독도 언제든 ‘넥스트 언더독’에 따라잡힐 수 있다. 언더독도 대기업병에 언제든 걸릴 수 있는 만큼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더독이 반짝 성공을 넘어 시장의 진정한 강자로 자리 잡고 그 위치를 지키려면 끊임없이 변화에 적응하고 남다른 전략을 실행하며 조직의 건강함을 유지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 중론이다.
[박수호 기자 park.suho@mk.co.kr, 정혜승 인턴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08호 (2025.05.07~2025.05.1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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