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7.01 13:00:00
[히코노미-25] 눈 부신 태양이 ‘특산품’인 이탈리아 카프리섬. 내리쬐는 햇빛에 취한 것이었을까. 붉은 빛이 감도는 와인에 데인 것이었을까. 중년의 사내가 위태로이 요트 위에서 휘청이고 있었다. 감미로운 음악과 아름다운 바다. 완벽에 가까운 이중주에 사내는 더 없는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요트 안쪽에서 마른 근육질의 미소년 여럿이 갑판 위로 걸어 나왔다. 선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소년의 몸을 어루만졌다. 입을 맞추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만의 작은 섬에 있는 것처럼, 사내들은 서로의 육체에서 쾌락을 탐했다.
그들만의 ‘소돔’(성경 속 쾌락에 빠져서 벌을 받은 도시)은 그러나 온전한 섬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어서였다. 사진기자들이었다. 그들은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렀다. 요트에 있던 중년 사내가 ‘거물’ 중 거물이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유명 사업가, 어린 소년들과 요트 위에서 엽색 행각.’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뽑힌 제목. 익명 보도였지만, 신상 공개는 시간문제였다. 바다 건너 독일에서 사업가의 정체가 밝혀졌다. 독일 최고의 기업 크루프, 그곳의 오너 프리드리히 알프레드 크루프(이하 프리드리히). 독일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가 외국에서 어린 소년들과 엽기적 동성애 행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성 추문은 폭탄급 파괴력을 갖기 마련이었다. 독일 통일 주역이었던 ‘크루프’가의 이야기라서 더욱 그랬다(과거 엘리베이터로 유명한 ‘티센 크루프’의 그 크루프다).
당대 독일인의 충격을 이해하기 위해선, 크루프 가문에 대한 약간의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크루프가 독일의 대표 기업으로 올라선 건 그의 아버지 알프레드 크루프 때였다.
알프레드가 주강(강철을 녹여 거푸집에 부어 특정 모양으로 변형하는 작업) 공장을 물려받았을 땐 그의 나이 고작 14살. 부친이 급작스레 사망하면서였다. 남겨진 건 빚과 조그만 공장. 어린 그에겐 버거운 것이라고, 공장은 이제 남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했다. 편견이 깨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프레드가 남다른 경영 감각으로 회사를 이끌고 있어서였다.
시대가 그에게 빛을 비췄다. 1830년대가 되자 유럽 전역에서 ‘철도’ 수요가 폭발하고 있었다. 강철 수요도 덩달아 늘어난다는 의미였다. 당시 독일은 수많은 소국으로 찢어져 있는 분열된 지역.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던 곳이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이라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한 번에 모든 걸 이룰 수 없는 법. 프로이센은 독일 지역의 단계적 통일을 구상했는데, 그 첫 단계가 경제적 통합이었다. 독일 ‘관세동맹’(졸버라인·Zollverein)의 출범이었다. 역내 관세를 폐지하고, 타국에 대해 공동 대응하는 경제 공동체. 프로이센의 작은 지방 도시 에센에 거점을 둔 크루프사도 독일 전역을 무대 삼아 뛰어놀 수 있게 됐다.
알프레드가 회사를 맡았을 때 직원은 고작 7명에 불과했지만, 8년만에 직원은 60명으로 늘어났다. ‘크루피언’(Kruppians)이라고 불리는 제국으로 성장할 크루프의 핵심 멤버들이었다. 회사는 점점 규모를 키워갔다. 합금으로 만든 숟가락과 포크가 대박을 쳤고, 철도용 휠 타이어 공급까지 성공했다. 오늘날 크루프의 로고도 철도용 타이어 휠에서 따온 것이다. 크루프는 점점 독일의 대표 기업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우리의 미래는 무기에 있다.”
주강 사업의 현재는 밝았고, 미래는 더욱 찬란했다. 알프레드는 그러나 만족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또 다른 욕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무기’ 산업이었다. 독일의 강자로 떠오른 프로이센. 알프레드는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의 주역이 되기를 꿈꿨다. 그 마중물에 ‘크루프’가 있기를 소망했다. ‘프로이센의 대장간’이 되어 통일 독일 제국을 일구는 것. “조악한 제품”이라는 악평에도 불구하고 크루프가 지속적으로 무기를 개발한 이유였다.
1857년 알프레드의 표정은 누구보다 밝았다. 크루프가 대포 개발에 성공해서였다. 기존 대포는 청동으로 만들어 폭발사고가 유독 많았다. 크루프의 제품은 고압에도 견딜 수 있는 강도로 제작된 진일보한 제품이었다. 무게 역시 기존 제품에 비해 월등히 가벼워 이동하기 편했다. 크루프가 누구보다 당당히 프로이센의 궁전에 찾아간 배경이었다.
당시 지도자였던 빌헬름은 크루프의 대포가 가진 잠재력을 단눈에 알아봤다. 크루프로부터 대규모 대포 구입을 결정했다. 그리고 연이은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 프로이센의 압도적 승리였다. 독일 포병대가 전방위적 활약을 한 덕분이었다. 크루프의 대포를 다루던 부대였다. 1870년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과 함께 프랑스 파리까지 점령해버리는 기염을 토했다(보불전쟁). 알프레드의 이름 앞에는 이제 또 다른 이름이 붙었다. ‘대포왕 알프레드’.
철의 재상이라고 불린 독일 통일의 주역 비스마르크도 ‘대포왕’ 없이는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크루프 없이는 ‘철’도 없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기업은 때론 나라의 운명을 바꾼다. 프로이센 왕실이 그에게 ‘귀족’ 작위를 제안한 이유였다. 알프레드는 단칼에 거절한다. “내 이름은 크루프.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의 패밀리 네임 석자가 주는 위상이 귀족의 작위보다 더 크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화장실 갈 때도 허락받아야 한다.”
알프레드는 그야말로 ‘철인’과 같았다.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으로 노동자를 통제했다. 충성 서약을 받는가 하면 화장실 갈 때조차도 작업반장의 허가를 받도록 요구했다. 인간의 생리적 본능까지 통제해야 한다는 게 그의 경영철학이었다.
노동자들이 학을 뗄만한 작업환경. 모두가 손가락질을 할 만한 경영태도. 그러나 그의 회사는 언제나 근로자로 넘쳐났다. 독일 모든 노동자들이 ‘크루프’에 들어가고 싶어 해서였다. 알프레드가 철저한 통제만큼이나 확실한 인센티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기가 막힌 ‘사내복지’였다.
근로자들의 가장 큰 근심은 가족들과 함께 살 집. 알프레드는 크루프 회사가 주택을 짓도록 지휘했다. 근로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사내 조직원을 위한 공원, 목욕탕, 학교까지 만들었다. 의료서비스도 무상으로 제공됐다. 크루프를 위해 일하다 죽은 근로자의 가족은 끝까지 책임졌다. 과부가 된 여인도, 아버지를 잃은 아들도 시름을 덜었다. 크루프가 모두 보살폈기 때문이다. 숨막히는 근로 환경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이 ‘Kruppianer’(크루피아너·크루프에서 일하는 사람)를 꿈꿨던 이유였다.
비스마르크는 크루프의 경영을 유심히 관찰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조직원의 충성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복지’ 제도가 필수적인 걸 크루프를 통해 배웠다. 1880년대부터 질병보험법, 산업재해보험법, 노령연금 등 각종 사회보장 제도가 세계 최초로 독일에서 도입됐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사회복지 제도가 크루프라는 대포왕으로부터 탄생한 셈.
터프한 경영 방식은 집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프레드는 결코 온화한 미소를 보이는 법이 없었다. 남자의 권위가 떨어지면 가장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여겨서였다. 그는 아들 프리드리히가 영 못마땅했다.
감정은 섬세하고, 몸은 허약했으며, 기질마저 사내답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식을 싸고도는 아내의 태도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내 베르타는 ‘작은 독재자’와 다름없는 알프레드를 피해 이탈리아로 자주 요양을 떠나기도 했다. 에센의 주조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을 피한다는 이유였지만, 속내는 남편 알프레드의 독설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어느 해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을 정도였다.
프리드리히는 이탈리아의 찬란한 태양을 참 좋했다. 언제나 구름 낀 날씨에, 매연으로 가득한 독일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넉넉한 자연에서 자란 이탈리아인들의 낙천적 성격도 퍽이나 즐거운 것이었다. 엄숙하고 근엄하기만 한 아버지와는 다른 이탈리아 남자들의 낙천성이 그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이었을까. 프리드리히는 이곳에서 동성애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대포왕이 죽었다.”
1887년 독일 사회가 들썩였다. 크루프의 수장이자 대포왕 알프레드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크루프라는 제국을 이끌 남자가 프리드리히가 됐다는 의미였다. 나약한 남자 프리드리히의 어깨는 천근만근. 크루피아너들의 우려도 커질 대로 커졌다. 마침 1880년대는 미국에서 카네기 등 내로라하는 철강 자본가들이 등장하고 있던 시기였다. 크루프의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워보였다.
프리드리히는 온화했지만 결코 우유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철강 시장 점유율이 떨어지자, 조직 전부를 군수산업으로 전환하는 변화를 단행한다. 새로운 합금 ‘니켈강’을 개발하고, 이를 활용해 새로운 군수 제품을 생산했다. 조선소를 인수해 해군 잠수정 생산을 주도한 것도 프리드리히였다. 1893년 프리드리히에게 한 사내가 찾아왔다. 자신이 개발하는 기계에 금전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남자의 이름은 루돌프 디젤. 오늘날 자동차에 들어가는 엔진이 이 남자의 이름을 따왔다.
프리드리히는 과감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제 크루프사의 생산 목록은 대포, 전함, 잠수정, 엔진을 망라한다. 크루프의 무기는 이제 독일만의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글로벌 병기 메이커’로서 크루프가 도약했다. 직원 수도 매출도 모두 두배로 늘었다. 프리드리히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모두 사라졌다.
프리드리히는 로비의 힘을 아는 경영자이기도 했다. 경쟁력 있는 제품만이 경영에 전부라는 순진한 생각은 당초부터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빌헬름 2세 황제와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던 이가 프리드리히였다. 프로이센 귀족왕과 독일 제국의회 의원직도 역임했다. 정치가 돈으로 연결되는 가장 큰 물줄기임을 알아서였다. 크루프가 군사용 선박을 개발하면, 빌헬름2세는 선박 구입 계획을 발표했다. 독일 제국의 해군력을 증강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그의 정치적·경제적 우군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다.
사업 스트레스에 찌들 때면 그는 언제나 이탈리아 카프리를 찾았다. 아름다운 태양이 모든 오염을 씻어주는 곳, 넉넉한 웃음을 머금은 사람들이 그의 감정을 보듬어주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육체적 쾌락을 풀 수 있는 곳이었다. 이탈리아의 미남자들이 프리드리히 별장에 모여들었다.
때로는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젊은 남성들과 향락을 즐겼다. 프리드리히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탈리아에서의 일은 언제나 이탈리아에 두고 오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다.
프리드리히의 저택에서 새어 나오는 교성 소리를 언론인들이 포착하기 시작했다. 현지 주민들이 당국에 민원을 넣거나, 언론에 제보하면서였다. 이탈리아 나폴리 지역 신문들은 익명으로 관련 기사를 보도했다. 1902년 가을부터였다.
진중한 뉴스는 엉덩이가 무겁지만, 가십은 날렵하기 짝이 없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익명의 뉴스가 독일 사회를 뒤흔들었다. 동성 스캔들의 당사자가 프리드리히라는 게 알려졌다. 보수성향의 가톨릭 신문부터 진보성향의 사회주의 신문까지 앞다퉈 이 소식을 다뤘다. 프리드리히가 황제 빌헬름 2세에 청탁해 신문을 압수 폐기해도 소용없었다. 당시 독일 형법상 동성애는 중대 범죄에 해당했다. 누구보다 모범을 보여야 할 사회 지도층이 수년 동안 외국서 동성 섹스파티를 벌였다니.
그의 주변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내 마가리트가 남편의 호색 행각을 꾸짖자 프리드리히는 그녀를 정신병원에 처넣었다. 크루프의 동지들도 그에게 곁눈질할 뿐 진정으로 그를 위로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첫 보도가 나온 지 일주일이 지난 1902년 11월 22일. 에센의 주택에서 한 사내가 죽은 채 발견된다. 프리드리히였다. 48세의 젊은 나이. 뇌졸중이라는 발표에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평소 지병도 없었던 탓에 그의 죽음에는 ‘자살’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독일을 철의 제국으로 만든 철인이었지만, 심장과 육체는 미처 철이 되지 못해 으스러진 남자. 프리드리히 크루프였다.
<네줄요약>
ㅇ제강공장으로 시작해 대포 개발로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을 이끈 회사가 오늘날 엘리베이터로도 유명한 크루프였다.
ㅇ사업가 알프레드는 철의 통치로 기업을 크게 성장시켰는데,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는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회사를 이끌었다.
ㅇ무기 산업을 크게 키운 프리드리히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의 네트워크로 회사의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ㅇ그러나 그의 말년에 이탈리아 소년들과 동성 섹스 스캔들이 터지면서 그는 때 이른 죽음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