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입력 2025.09.19 15:02:29
(16) 감각의 교차편집
인공지능(AI)이 ‘자아’를 갖는 날, 인간은 영생하게 될 겁니다. 죽음을 대가로 인간이 얻어낸 ‘자아’를 무한한 존재인 AI가 갖게 된다면, 인간 역시 영원히 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 미래에 AI가 자아를 갖는다고 해도, 인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자아일 것입니다. 인간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AI가 왜 인간과 같은 자아를 갖기 어려운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자아의 형성 과정은 ‘창조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엄마 뱃속에서 아기는 엄마와 한몸이었습니다. 태어나면 육체적으로는 다른 존재가 되지만 한동안 엄마와 자신이 다른 존재라는 의식은 없습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아기와 엄마가 ‘이중합일(dual unity)’ 또는 ‘일체성(oneness)’ 상태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아기는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세상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장난감을 쥐고 흔들면 딸랑 소리가 나고, 자신이 웃으면 엄마도 따라 웃습니다. 이 상호작용은 시각, 청각, 촉각, 운동감각, 후각, 미각이라는 ‘감각 양식(sensory modality)’을 통해 이뤄집니다. 아울러 모든 감각 양식에는 시간성, 강도, 형태, 리듬, 운동성의 다섯 가지 ‘감각 정서의 차원(dimensions of vitality affects)’이 공통적으로 작동합니다.
생후 7개월 정도가 되면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에 변화가 더 다양하게, 더 자주 목격됩니다. 본격적인 ‘정서 조율’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미국 정신분석학자이자 발달심리학자 다니엘 스턴은 정서 조율에 3가지 형식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동일감각 조율(intramodal)’ ‘감각 간 조율(intermodal)’ ‘초감각 조율(amodal)’.
엄마와 아기가 동일한 감각 양식으로 톤·길이·세기·박자와 같은 감각 정서 차원을 살짝 변주해 정서를 맞추는 것이 ‘동일감각 조율’입니다. ‘감각 간 조율’은 아기가 한 감각으로 표현한 정서를 엄마가 다른 감각으로 되돌려주는 방식입니다. 감각 채널은 달라지지만, 그 안의 리듬이나 강도 같은 정서적 구조는 그대로 이어집니다.
‘초감각 조율’은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는 ‘어떤 감각을 쓰느냐’가 핵심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정서가 가진 성질 자체입니다. 아기가 짧고 강하게 “응!” 하고 소리 내면, 엄마는 몸을 톡 끊어 움직이거나 짧게 두드려 똑같이 ‘짧고 강한 느낌’을 되돌려줍니다. 반대로 아기가 길고 느리게 흐느끼면, 엄마는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 ‘길고 부드러운 흐름’을 맞춰줍니다.
이 같은 ‘감각의 교차편집’이 바로 ‘자아 탄생의 비밀’입니다. 나와 동일한 감정을 느끼는, 그러나 ‘나와는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이 과정을 통해 드디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아’가 탄생합니다. 엄마와 아기가 ‘동일한 육체’에서 출생 이후 ‘분리된 육체’로, 그리고 드디어 ‘서로 다른 마음과 감정을 가진 독립된 개체’로 발전하는 ‘인간 창조’의 과정입니다. 러시아 심리학자 비고츠키가 이야기했던 ‘inter → inner의 법칙’은 수십 년이 지나 다니엘 스턴에 의해 이론적으로 완성됩니다.
‘색을 듣고, 소리를 본다!’
1980년대 심리학에서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감각의 교차편집’은 흥미롭게도 수십 년 전 전혀 다른 맥락에서 치열하게 논의되었습니다(참고로 다니엘 스턴은 ‘감각 교차조율(cross-modal attunement)’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나는 의미를 확대해 ‘감각의 교차편집(Cross-modal editing)’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추상화입니다. 1939년 프랑스 무대 장치 디자이너 루이 다게르가 카메라를 발명한 후, 화가들에게는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사물을 그대로 화폭에 재현하는 것은 카메라가 훨씬 더 잘했기 때문이지요.
화가들은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인상주의는 사물의 정확한 모사 대신 빛의 변화와 순간의 인상을 ‘후다닥’ 그렸습니다. 후기 인상주의나 표현주의는 인간 내면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미술관 관람객들은 카메라로 인한 위기를 적극적으로 타개한 인상파 이후 그림 앞에 줄을 섭니다. 위기가 기회가 된 셈입니다. 러시아 출신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아예 회화 장르를 벗어납니다.
3차원 대상을 2차원 화폭에 재현하는 것이 더 이상 의미 없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없는 것을 그리는 것, 즉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창조할 수 있을까요? 칸딘스키는 음악을 곁눈질했습니다.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음표’라는 추상적 기호로 구현해 그 복잡한 교향곡까지 만들어냅니다. 칸딘스키는 이런 음악의 창조 방법론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1911년 1월 2일, 칸딘스키는 뮌헨에서 회화의 미래에 관해 같은 고민을 하며, ‘청기사파’ 전시회를 준비하던 동료들과 아놀드 쇤베르크 음악회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쇤베르크는 불협화음과 ‘무조음악’으로 논쟁의 중심에 섰던 인물입니다. 음악회에서 쇤베르크는 ‘재현을 거부하는 음악’을 넘어, 음악적 조성의 규칙 자체를 거부하는 작품을 연주했습니다.
쇤베르크 음악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칸딘스키는 흥분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회화의 돌파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그는 ‘내적 필연성’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외부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내적 필연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이후 그는 앞으로 추구할 추상화의 시작을 알리는 그림을 그립니다. ‘인상3-음악회’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음악은 ‘음표’라는 창조 도구가 있습니다. 높낮이, 길이, 강약, 음색 등 소리의 질적 차원을 표현하는 부호입니다. 이 최소 단위를 모아 선율, 화성, 리듬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회화에 있어서 음표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점, 선, 면, 색깔입니다. 십여 년이 지나 칸딘스키는 독일의 ‘창조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기초과정 교과서인 ‘점·선·면’을 집필합니다. 그는 조형의 기초 단위를 음악적 표현을 빌려와 이렇게 설명합니다.
가장 단순한 시각적 단위인 ‘점’은 ‘침묵 속의 순간적 소리’와 같다고 칸딘스키는 이야기합니다. ‘선’은 점이 움직여 생긴 궤적으로 음악의 프레이즈나 리듬에 해당합니다. ‘면’은 선이 둘러싸는 공간으로 화음이 이루는 화성적 울림과 유사합니다. ‘색’은 정서적 강도와 울림을 규정하는 요소입니다. 칸딘스키는 색채의 심리적 효과를 강조하며 색과 형태를 대응시키려는 실험을 바우하우스에서 거의 강박적으로 실시했습니다. 그의 창조적 교육 철학은 이렇게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색을 듣고, 소리를 본다.’
대상을 재현하지 않고 점, 선, 면, 색깔의 조형적 기본 요소로 구성되는 추상화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요? 이는 회화의 한계를 벗어난 또 다른 차원입니다. 이를 칸딘스키는 ‘종합예술’이라고 표현합니다. 칸딘스키가 바우하우스 선생이 되어달라는 발터 그로피우스의 요청에 적극 응한 까닭입니다.
K-pop은 음악일까요, 춤일까요?
우연히 라디오에서 흥미로운 논쟁을 들었습니다. ‘K팝(K-pop)은 음악인가, 춤인가?’라는 주제였습니다. 문제 제기는 음악 평론가가 했습니다. 음악적으로 K팝 수준이 너무 단조롭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춤 역시 빤한 집단 군무일 뿐이고 그 춤을 보고 있으면 연습생에 대한 연민만 생긴다고도 했습니다.
과도한 비난이지만, 음악적 완성도나 단체 군무에 대한 비판은 반론을 제기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K팝의 이 놀라운 성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나는 ‘종합예술’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칸딘스키가 꿈꿨던 바로 그 종합예술 말입니다. K팝은 기존의 춤, 노래의 경계를 뛰어넘는 ‘창조적 편집물’입니다. 이 편집에는 무대, 유튜브, 각종 SNS를 통한 팬들과의 상호작용까지 포함됩니다. 사이버스페이스까지를 포함하는 종합예술로 설명해야 K팝 성공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종합예술’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1849년 ‘예술과 혁명’이란 책에서 처음 체계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시·음악·무용·연극·무대장치·건축이 하나로 통합된 예술의 합일체를 뜻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 독일 낭만주의 미학에서 산발적으로 논의되기는 했으나, 바그너 ‘음악극’처럼 종합예술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례는 없습니다. 바그너는 기존 오페라가 아리아를 멋지게 부르는 성악가의 쇼로 전락했다고 비판합니다. 참고로, 오페라는 당시의 Popular song, 즉 Pop-song이었습니다. 시작은 귀족의 전유물이었지만, 공공극장이 생겨난 후 티켓을 구매해서 보는 대중적 오락이 되었습니다. 오페라 가수는 오늘날 아이돌처럼 히트곡을 반복해서 부르고, 관객은 환호했습니다. 지금의 K팝과 다를 바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그너는 그런 오페라가 영 못마땅했습니다. 그 바탕에는 이탈리아나 프랑스에 비해 형편없던 독일 오페라의 열등감이 깔려 있습니다. 바그너는 독일 음악을 유럽 중심 무대에 올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성악적 선율에 효율적이지 않은 독일어의 약점을 감춰야 했습니다. 그래서 음악의 드라마적 특징을 강조합니다. 아리아처럼 독립된 노래가 아니라, 문학적인 대사와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했습니다. 바그너의 이 같은 생각이 구현된 대표적 작품이 1848~1874년에 걸쳐 작곡된 4부작 대서사 ‘니벨룽의 반지’입니다.
바그너가 시작한 종합예술의 이상을 더욱 확대해 실험한 곳이 바로 바우하우스입니다. 바우하우스는 음악·연극·무용·건축·디자인·회화를 하나의 교육 과정 속에 통합하며, 예술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창조적 언어를 모색했습니다. 바그너의 종합예술에 대한 이념을 더욱 확대한 것이지요. 특히 ‘색을 듣고, 소리를 본다’는 감각의 교차편집이 이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되었습니다. 칸딘스키는 점·선·면·색을 마치 음표처럼 다루며 시각예술을 음악과 같은 내적 필연성의 언어로 체계화하려 했습니다.
‘창조의 비밀’에 관한 지금까지의 긴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신처럼 되려는 ‘창조’의 욕망은 회화가 대상의 재현이라는 고유의 영역을 카메라에 내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추상화는 음악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이게 했습니다. 칸딘스키의 추천으로 바우하우스 선생이 된 또 다른 추상화가 파울 클레(Paul Klee)는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라고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추상화의 위대함은 회화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추상화가 대상의 재현을 벗어나 대상과 편집되어 새로운 메타언어를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design)’입니다. 이건 엄청난 사건입니다. 대상의 재현에서 쫓겨난 회화가 대상에 스며들어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바우하우스에서 시작된 이 감각의 교차편집은 스티브 잡스의 애플을 거쳐 오늘날의 AI 혁명으로 이어집니다.
인간이 신의 ‘천지창조(creation)’처럼 ‘창조적(creative)’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은 추상화가 종합예술로 편입되던 1920년대입니다. 구글 엔그램 뷰어를 조회하면 ‘창조성(creativity)’이란 단어는 바로 이 무렵부터 일상어가 됩니다. 20세기 후반에서야 비로소 밝혀지는 인간 자아 탄생의 비밀, 즉 ‘감각의 교차편집’을 사람들은 바로 이 무렵부터 깨닫고 응용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시작한 겁니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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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28호 (2025.09.24~09.3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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