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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30%’ 한국당구최강전, TV당구중계 신화를 쓰다

박태호 당구칼럼 ‘큐따라 바람따라’⑤당구대부 김문장-2
‘95서울컵국제당구대회’이상천 클루망 등 유명선수 대거 출전

  • 기사입력:2018.05.13 08:00:03
  • 최종수정:2018.05.13 09:5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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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95년 서울 광장동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열린 ‘SBS배 국제당구대회’ 경기 장면. 레이몽 클루망이 샷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제공=큐스포츠>


김영삼 제14대 대통령이 취임한 1993년 2월, 군 출신이며 청와대에서 활동했던 이명화 씨는 대한당구경기인협회 제3대 회장에 추대됐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한국당구위원회로 넘어간 상태여서 이명화 회장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잠시 의욕을 보이던 그는 돌연 사퇴를 선언했고, 대한당구경기인협회는 무주공산이 돼버렸다.

◆한국당구최강전 TV중계 타고 빅히트

이 무렵, TV중계를 탄 ‘한국당구최강전’은 빅히트를 쳤다. 16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92-93시즌부터 SBS가 중계하기 시작했다. 한국당구최강전12차례 그랑프리3회등을 포함한 20여차례의 당구중계가 공중파를 통해 방송되었다, 30%가 넘는 시청률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때는 지금처럼 종편이나 케이블 채널이 없고, 공중파 채널 3~4개만 있던 시절이었다. 30%는 당시 인기 드라마나 찍던 어마어마한 시청률이었다. 그러니 당구계나 방송계에서 난리가 난건 당연했다.

원래 ‘한국당구최강전’은 시작할 때부터 ‘잘해야 한두번 하겠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공전의 시청률에 힘입어 계속 진행됐다. 2차 시리즈인 ‘93-94 한국당구최강전’이 이어졌고, 대회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인기에 힘입어 타이틀스폰서 구하기에 나섰으나, 여의치 않았다.

비록 타이틀스폰서 구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한국당구최강전’은 한국당구사에 한 획을 그은 사업이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이명화 회장이 사퇴한 대한당구경기인협회는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했다. 이에 이병희 사무총장이 서울 신길동 김문장 대한당구회 회장 자택을 찾아갔다. 용건은 간단했다. 김 회장이 대한당구경기인협회 회장도 맡아달라는 것.

김문장 회장이 이를 수락하며 1993년 7월 제4대 대한당구경기인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이로써 김문장 회장은 한국당구 양대단체(한국당구위원회, 대한당구경기인협회)수장에 올라 한국당구계를 평정하게 됐다.

양대 단체 회장을 맡은 김문장 회장은 각종 사업구상에 들어갔다. 93년 8월 열린 대전엑스포를 기념해서 ‘엑스포 기념 대전 그랑프리 대회’와 ‘온양 그랑프리’ ‘수원 그랑프리’ 등 ‘그랑 프리’대회를 잇달아 개최했다. 또한 제주도지사배 대회와 예술구 및 4구대회를 열면서 당구저변을 넓히기 위해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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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SBS배 국제당구대회’에서 공동3위를 차지한 이상천 선수. <사진 제공=큐스포츠>


◆클루망, 이상천 참가 ‘95 SBS배 국제당구대회’ 이목 집중

이어 1995년 김문장 회장은 세계적인 선수들을 초청한 ‘인비테이션 당구대회’를 TV로 생중계하는 일을 추진했다. 그해 2월 서울 광장동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서울컵 국제당구대회’를 기획했는데, SBS가 생중계해 화제가 됐다. 이 대회에는 전년도 3쿠션 세계챔피언에 오른 ‘상리’이상천과 ‘당구전설’ 레이몽 클루망(벨기에) 등 유명선수가 대거 참가해 대회 개최 전부터 당구인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우승 클루망, 준우승 박승희, 공동3위 이상천‧준이치 고모리)

또한 그해 ‘한국당구대제전’(88체육관)과 ‘한일당구최강전’ 등 대회도 추진해 나갔다.

당시는 선뜻 당구대회 후원에 나서는 기업도 드물었고, 당구단체 재정역시 취약했다. 김문장 회장은 그런 환경 속에서도 각종 대회를 개최하는 놀라운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95-96 한국당구최강전’을 목전에 두고 심신이 지쳐 있었던 김문장 회장은 회장직을 사임한 후 일선에서 물러났다. 비록 그가 당구계의 큰 짐을 내려놓았지만, 김문장 회장은 한국당구의 오늘이 있기까지 절대적 존재였다. 당구인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한국당구의 국제화’ ‘한국당구의 대중화’를 이끈 선구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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