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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률이 이놈 야속하게 꿈에 한번을 안오네”

`스승`김정규 이사 추모대회 맞아 `특별기고`
“갱률이라 합니더”2000년 서울 삼성동서 첫 만남
2010안탈리아W 우승 마지막 앞돌려치기에 “저런…”
당구에 미친 인생…‘된장당구’로 세계챔프 오른 선수

  • 기사입력:2018.04.14 08:00:03
  • 최종수정:2018.04.15 02: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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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14일부터 이틀간 "한국당구 개척자" 고 김경률을 추모하는 "제3회 김경률 추모배 팀클럽 3쿠션당구대회’가 열린다. MK빌리어드뉴스는 고 김경률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당구스승"인 김정규 대한당구연맹 이사의 특별기고를 마련했다. 사진은 "2010 터키 안탈리아 3쿠션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김경률이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들고 환호하는 모습. (대한당구연맹 제공)
[편집자주]지난 2월 22일, 한국당구 최초 ‘세계팀3쿠션선수권’ 2연패를 달성한 최성원-강동궁이 예선전을 시작하던 그날. 많은 당구인들이 35세에 요절한 한 선수를 떠올렸다. 이날은 바로 고 김경률(1980~2015)의 기일이었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국당구를 세계 무대에 각인시킨 그다. 당구인들은 2016년부터 대회를 열고 그를 추모하고 있다. 올해 역시 오는 14일부터 이틀간 ‘김경률 추모배 팀클럽 3쿠션당구대회’가 열린다. 또한 그가 2010년 한국인 최초로 세계당구를 제패했던 터키안탈리아월드컵이 23일부터 시작된다. MK빌리어드뉴스가 그를 추억하기 위해 김정규 대한당구연맹 이사의 특별기고를 마련했다.

2000년대 초, 지인이 운영하는 서울 삼성동 당구장을 방문했을 때다. 당구장 한 켠에서 덩치 큰 사내가 뭔가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당구장을 나가려는데 그 친구가 헐레벌떡 쫓아왔다. 숨을 고르며 곧 경상도 사투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꺼. 갱률이라고 합니더.” 이게 경률이와의 첫 만남이다. 그땐 꿈에도 몰랐다. 그 친구가 한국당구 역사에 큰 획을 긋는 ‘대(大)선수’가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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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김경률, 선배들이 염원하면 "된장당구 세계챔프"가 되다" "2010 안탈리아 월드컵" 정상에 오른 김경률이 공항에서 대한당구연맹 관계자 등의 환영을 받고 있다. (김정규 대한당구연맹 이사 제공)
◇선배들의 염원 ‘된장당구 챔프’ 김경률이 해내다

“똘이장군(김정규씨의 애칭), ‘된장당구’ 세계챔피언을 만들어 다오!”

2000년대 중반부터 지도자로 나선 내게 선배들이 항상 하던 말이다. 한국 토종 세계챔피언을 바란다는 뜻이었다. 물론 우리에겐 1992년 ‘3쿠션월드컵 투어’ 세계챔피언인 고 이상천 선배가 있었지만, 그분은 미국과 한국 2중국적이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선배들이 세계 당구판을 바라보는 시각이 딱 그러할 때,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당구로 성장한 ‘개구리’(김경률의 애칭‧경상도 사투리로 ‘갱률이’를 빠르게 발음)는 세계무대 노크를 넘어 꼭대기까지 넘봤다.

2010년 2월 21일 밤 11시(한국시간). 경률이가 터키 안탈리아3쿠션월드컵 결승전 무대에 섰다. 아직도 그날 현장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큐를 들고 인사하는 경률이에게 터키 관객들이 큰 환호를 보냈다. 그들은 경률이가 상대 딕 야스퍼스(네덜란드)를 꺾고 ‘4대천왕’의 아성을 깨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때 나는 역사적인 한국인 최초 ‘3쿠션월드컵 챔프’의 탄생을 기록할 요량으로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본부석 단상에 올랐다.

긴장감? 솔직히 말하면 ‘무심’(無心) 상태였다. 당구 선수들은 집중력이 극에 달하면 잡념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심리적인 압박감을 벗어나, 오로지 시야에 테이블과 공만 보인다. 신체는 긴장이 풀리고, 감각은 최고치를 찍는다.

필자는 당시 선수가 아니었지만 그 경험을 했고, 당시 경률이도 그래 보였다. 멍하니 야스퍼스를 바라보던 눈빛에서 ‘평정심’이 읽혔다.

아니나 다를까, 경률이는 첫 세트를 접전 끝에 13:15로 내줬지만, 2세트(15:7) 3세트(15:11)를 내리 따내며 세트스코어 2:1로 앞서갔다. (편집자 주=당시 3쿠션월드컵은 15점 5세트 경기)

야스퍼스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아마 그에겐 2년 전인 2008년 9월 ‘수원월드컵’ 결승전에서 이겼던 그 경률이와는 다른 선수로 느껴졌을 것이다.

수원월드컵 결승전 패배 직후 경률이가 하소연했다. “관중들이 다른나라 선수들 잘 할 때도 박수칩니더. 저만 응원해줬음 좋겠는데. 하하” 물론 애교섞인 투정이었다.

그런데 이를 지도자 입장에서 보면, 경기장 환경이 눈에 보일 만큼 게임에 몰입하지 못한 것이다. 2008년의 야스퍼스는 달랐다. 2세트 종료 후, 휴식시간에 대기석에 앉아 계속 전열을 불태웠다.

반대로 2010년 2월 21일, 그날만큼은 경률이의 집중력이 야스퍼스를 압도했다. 비록 4세트를 2:15로 내줬지만, 경률이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이윽고 마지막 5세트에 14:8로 승리까지 단 1점만을 남겨놓게 됐다.

공 3개가 뒤돌려치기에 좋은 배치로 섰다. 국내 톱클래스 선수들의 샷 성공률을 분석한 적 있다. 옆돌리기, 뒤돌려치기 등 쉬운배치 성공률이 82~83%에 달한다. 그럼 경률이의 성공률은? 84.7%였다. 과장조금 보태서 ‘치면 다 맞는’ 수준이다. 경률이는 또 뒤돌려치기를 가장 자신있어 했다. 그래서 마지막은 그 샷을 선택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경률이는 앞돌려치기를 시도했다. 순간 심장이 움찔했다. 그 짧은 순간 속으로 “미쳤네. 미쳤어”를 반복했다.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그러는 동안 수구는 제 1목적구를 맞은 다음 네 번의 쿠션 반동을 거쳤다. 그리고 나를 비웃듯 제2목적구에 정확하게 맞았다. 우승이었다.

평소 세리머니를 자제하던 경률이는 큐를 두 손으로 번쩍 들더니 포효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로 고국에 승전보를 알렸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쉽진 않겠지만 경률이라면 언젠간 선배들이 바라던 ‘된장당구 세계챔프’가 되어줄 것이라고 내심 믿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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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한국당구대표팀. 차유람 임윤미 허정한 정영화 등 선수들과 함께 김경률(윗줄 맨 오른쪽), 김정규씨(아랫줄 맨 왼쪽)가 보인다.
◇당구는 ‘냉철하게’ 사람은 ‘따뜻하게’

가끔 이런 상상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뭔가를 이룰 수 있다면 악마에게 혼이라도 팔겠다. 장담컨대 아마 경률이는 당구가 더 발전한다면, 되레 그 악마로부터 영혼을 빼앗아 오고도 남을 친구다.

그만큼 경률이는 당구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2000년대 초, 경남 양산에서 상경한 경률이는 “당구를 아주 열성적으로 잘 치는 친구”로 소문이 났다. 기특한 후배였기에 자주 찾아가 큐를 겨누었고, 보면 볼수록 당구에서 만큼은 ‘진국’이란 느낌을 받았다.

우선 당구를 대하는 진지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경률이는 게임을 걸어오면 상대가 하점자든, 고점자든 항상 진지한 자세로 상대했다. 간혹 고수들이 하점자와의 대결에서 힘을 빼는 경우가 있는데, 경률이는 그렇지 않았다. 속된 말로 ‘얄짤’ 없었다.

또 연습량뿐만 아니라 하루 소화하는 게임량도 엄청났다. 2000년대 초중반, 경률이가 일하던 서울 삼성동 당구장에 가보면 일하지 않을 때 그의 테이블은 쉬지않고 게임이 돌았다. 그 광경에 게임을 무척 즐기던 나도 여러 번 혀를 내둘렀다.

이처럼 당구를 냉철하고 진지하게 대하는 경률이는, 반대로 인간관계에선 그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선배에겐 자신을 낮추고, 동료 및 후배들을 위해선 희생할 줄 아는 친구였다.

이런 ‘사람냄새 풍기는’ 경률이였지만, 나에게 만큼은 당구 외적인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았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코치와 선수로 만났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선배이자 스승인 내게 당구 외적인 부담감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리라.

2004년, 대한당구연맹이 이듬해부터 3쿠션월드컵 출전을 지원해준다고 했을 때 “자신있십니더, 내 돈으로라도 나갈랍니다”라고 했던 일화도 한참 뒤에서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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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국가대표팀 시절 조재호 등과 기념촬영 하고 있는 김경률, 김정규씨. (김정규 대한당구연맹 이사 제공)
◇“경률아, 지금도 어딘가서 공치고 있지?”

부모들이 자식 키울 때 힘에 부치면 우스갯소리로 ‘자식은 웬수(원수)’라고 한다. 경률이가 딱 그랬다. 어떨 땐 한없이 순박한 후배였지만, 때로는 ‘웬수’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특히 전지훈련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 관계는 소원해졌다. 경률이는 공을 못치면 불안해 했다. 비행기타고 이동해 시차적응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던 것이다.

한 예로, ‘2010 안탈리아월드컵’ 직전에 열흘간 독일로 전지훈련이 떠난 적 있다. 독일 맨하임에서 클럽을 섭외했다. 현지적응 및 실전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그럴때마다 경률이는 손을 싹싹빌며 “장군님, 제발 않가면 안됩니꺼” 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과정이 선수에게 꼭 필요하다고 항상 강조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웬수관계’가 됐다.

이처럼 내겐 애증의 인물 경률이. 2015년 2월 22일, 그날 이후로 항상 그립다.

(강)동궁이는 가끔 “장군님(선수들이 김정규 씨를 부르는 애칭), 어제 꿈에 경률이 왔다갔어요” 하던데, 아직 내게는 한번 오지 않았다. 야속하다. 아마 동궁이는 게임 안풀릴 때마다 친구가 누워있는 곳을 다녀와서 그런가 보다.

경률아, 네가 문 열고 “장군님, 개구리 왔십니더”하고 성큼성큼 오는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너라면 지금도 어디선가 분명히 공을 치고 있을 거야.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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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김정규 대한당구연맹 이사]


글:김정규 대한당구연맹 이사

정리:이상연 MK빌리어드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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