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빌리어드뉴스 창간기획] 월드컵투어 마지막 대회서 우승…80점차 뒤집고 극적 1위 ‘동양의 새 당구황제 등장’ 들썩…NYT도 2개면 대서특필
기사입력:2017.06.27 16:24:09
최종수정:2017.06.28 19:07:59
한국에 당구가 도입된지 벌써 100년을 훌쩍 넘었다. 1909년 순종의 건강관리를 위해 당구테이블 2대가 공수된 것이 시초다. 그 동안 한국당구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담배연기 자욱한 오락에서 이제는 전국민이 즐기는 스포츠로 거듭나고 있다. 감히 나라밖으로 나갈 엄두도 못내던 ‘우물안 개구리’ 시절도 벗어났다. 이제는 4명의 월드챔프를 보유한 세계적인 당구강국이 됐다. 선배들은 사회의 불편한 시선 속에서도 큐를 놓지 않았고, 후배들은 그 위에 ‘한국당구의 꽃’을 피웠다. MK빌리어드뉴스가 108년 한국당구사의 획을 그은 결정적 경기를 모아 ‘한국당구 최고의 순간’시리즈로 조명한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2년째인 1994년. 사회적으로 금융개혁 바람이 한창이던 이 해에, 한국당구계는 ‘월드챔프’의 탄생으로 고무됐다. 주인공은 고 이상천. 훗날 국내를 넘어 세계에서도 ‘당구황제’ 쌩리(Sang Lee)로 칭송받게되는 사건이 1994년 1월 9일 일어났다.
1995년 2월 1일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열린 ‘SBS 서울컵 국제당구대회’ 입상 후 상패와 상금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고 이상천.<박태호 대한당구연맹 부회장 제공>
경기당일(9일) 오후 6시 벨기에 켄트에서 BWA(세계프로당구협회) 1993/94 월드컵 투어 파이널대회 결승전이 열렸다. 이 무대에 오른 이상천은 큐를 꽉 잡았다. 여기서 승리하면 1년간 이어진 월드컵 투어의 종합챔피언이 된다.
3쿠션 월드컵은 해마다 5~7개국 투어 방식으로 열린다. 지금은 UMB(세계캐롬연맹)가 주최하지만, 2000년대 초반 BWA가 사라지기 전까지 BWA가 개최했다. 또 현재 월드컵은 한 대회마다 우승자를 시상하지만, 당시엔 1년간의 투어 승점을 합산해 우승자를 가렸다. 투어별 승점은 1위 60점, 2위 45점, 3위 30점, 마지막 투어 파이널대회 1위는 90점을 받았다.
벨기에 켄트에서 열린 파이널대회 전까지 이상천의 종합승점은 130점. 승점 1위 토브욘 브롬달(스웨덴)은 210점으로 이상천보다 80점이나 앞섰다. 그런데 잘 나가던 브롬달이 파이널대회에선 16강에서 탈락했다. 이상천이 승점 90점을 획득하면 투어 종합우승까지 넘볼 수 있는 상황.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당구 관계자들은 이상천의 우승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앞선 이탈리아 투어 16강에서 탈락한 그였다. 또 브롬달은 탈락했지만, 당대 최강자들인 리차드 비탈리스(프랑스), 마르코 자네티(이탈리아), ‘무서운 신예’ 프레데릭 쿠드롱(벨기에) 등 실력자들이 수두룩했다.
막상 대회가 시작되니 이상천은 이런 예상을 보기좋게 뒤집었다. 파죽지세로 강자들을 꺾고 결국 결승까지 진출, 한국당구 사상 첫 월드챔피언 탄생을 목전에 뒀다.
마지막 결승상대는 쿠드롱. 이상천은 침착했다. 당시 경기는 15점 3선승제로 진행됐다. 이상천은 15:4로 1세트를 손쉽게 따냈다. 2세트는 6:15로 내줬지만, 이후 3‧4세트를 각각 15:6, 15:8로 가져왔다. 이로써 이상천은 최종승점 220점을 획득, 브롬달(210점)을 10점차로 제치고 기적과 같은 역전드라마를 썼다.
이상천의 세계챔피언 등극은 개인적인 성과를 넘어 한국당구사로도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한국과 미국 이중국적 선수였지만, 한국인이 세계당구계에 큰 족적을 남긴 건 그가 최초였다.
이 소식을 국내 주요 스포츠신문들이 1면 머릿기사로 썼다. ‘이상천 세계 당구왕’ ‘이상천 3쿠션 당구 사상 첫 월드챔프’ 등 제목이 달렸다.
1994년 월드컵 투어 직후 이상천의 종합우승 소식을 1면에 실은 스포츠 신문 <박태호 대한당구연맹 부회장 제공>
1992‧93 SBS ‘한국당구 최강전’으로 타오르기 시작한 당구열풍은 이내 ‘빵’ 터졌다.
이상천은 해외 언론에서도 주목했다. 대회 직후 이틀동안 유럽 30여개 언론이 이상천을 ‘동양의 새 당구황제’로 소개했고, 열흘 뒤 미국 ‘뉴욕타임스’는 이상천의 우승소식을 2개면에 걸쳐 자세히 보도했다.
당시 대한당구선수협회 홍보이사였던 박태호 대한당구연맹 부회장은 “이상천의 월드컵 투어 우승은 두 가지의 큰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첫째로 비록 이중국적이지만 한국인이 세계당구대회 챔피언에 등극했다는 점, 두 번째로 당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더 증폭시켰다는 점 등을 들었다. 당시 당구는 사회적 냉대를 받던 스포츠였다. 당구를 취재하던 스포츠언론 기자들도 체육부가 아닌 레저부 소속이었다.
박태호 부회장은 “이상천의 우승으로 기존 당구의 안좋은 이미지가 많이 희석됨으로써 한국당구가 스포츠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며 “이는 100년 넘는 한국당구사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1995년 2월 1일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열린 ‘SBS 서울컵 국제당구대회’ 입상 후 상패와 상금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고 이상천.<박태호 대한당구연맹 부회장 제공>
1995년 2월 1일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열린 ‘SBS 서울컵 국제당구대회’ 입상 후 상패와 상금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고 이상천.<박태호 대한당구연맹 부회장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