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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없이 대선 치를땐 증오의 정치 반복”...한국 원로 사회학자의 고언

‘적대 정치 앤솔러지’ 출간한 송호근 한림대 석좌교수 ‘증오’ 내뱉는 정치인일수록 대중 인기 독차지하고 있어 현 정치 극단적 양극화 현상 SNS 가세로 분열 심화시켜 선거구제·공천 개혁도 시급

  • 이진한
  • 기사입력:2025.03.04 06:07:49
  • 최종수정:2025.03.04 06: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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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 정치 앤솔러지’ 출간한 송호근 한림대 석좌교수

‘증오’ 내뱉는 정치인일수록
대중 인기 독차지하고 있어

현 정치 극단적 양극화 현상
SNS 가세로 분열 심화시켜
선거구제·공천 개혁도 시급
‘적대 정치 앤솔러지’를 출간한 송호근 한림대 석좌교수.  한주형 기자
‘적대 정치 앤솔러지’를 출간한 송호근 한림대 석좌교수. 한주형 기자

지난해 12·3 비상계엄에서 촉발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이 헌법재판관들의 평의와 선고만을 남겨두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이달 중 탄핵소추를 인용할 경우 ‘대통령 궐위 시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출해야 한다’는 헌법 규정에 맞춰 곧장 조기 대선 국면에 들어선다. 정치권의 행보는 더 빠르다.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일부 의원들에게 예상 경선 일정을 공유했다고 알려졌으며, 여당의 대권주자들도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둔 발언을 밝히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 사회학자인 송호근 한림대 석좌교수는 이 같은 조기 대선 전환 국면에 우려를 표했다. ‘적대 정치’로 망가진 현행 정치제도를 바꾸지 않고서는 지금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최근 매일경제와 인터뷰에서 “지난 12·3 계엄으로 한국 민주주의는 사망신고서를 제출했다”며 “‘증오의 정치’와 ‘정치 양극화’ 극복 없이 곧장 대선을 치른다면 또 다른 실패한 정권만 창출될 것”이라고 개탄했다.

지난 1일 출간한 ‘적대 정치 앤솔러지’는 송 교수의 이 같은 문제의식이 집약된 책이다. 지난 20여년간 한국의 민주주의가 적대정치의 난장판이었다는 점에서 앤솔러지라 붙였다. 그는 “윤석열 정권 2년 7개월은 여야 간 공방전으로 얼룩진 정신 사나운 시간이었다”며 “지난해 11월 여야 대치가 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집필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어 “정국이 이 지경에 이른 데에는 윤 대통령의 실정이 표면에 있지만 국민의 관점에서 정권 탈환을 위해 현 정권을 공격하기만 한 민주당도 책임이 크다”고 덧붙였다.

송 교수는 ‘적대 정치’의 씨앗이 발화한 시기로 노무현 정권을 꼽았다. 2004년 치러진 제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면서 ‘86세대’가 정치권에 대거 진입한 것이 독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른바 이들 ‘혁명세대’가 독재 투쟁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운영하면서 ‘극단적 양극화’가 시작했다”며 “시민단체 또한 이념 전쟁에 불을 댕겼다”고 설명했다.

이어 “민주주의는 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적과의 동침’ ”이라며 “타협정치라는 개념이 이들에게 발견되지 않는다면 혁명세대의 신념은 예전에는 선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악”이라고 덧붙였다.

2008년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여야 모두를 ‘증오의 정치’로 내딛게 만들었다고 평했다. 상대 진영의 공격에 살아남기 위해 권력 장악을 향한 필사적 싸움을 양측 모두 민생과 민의로 포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노무현 정권 후반기에 발원한 적대감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증폭되고 문재인 정권에 이르러 그 폭력적 실체를 드러낸 것”이라며 “증오의 단어를 내뱉는 정치인일수록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영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도 위기 요인으로 지적했다. 제조업을 근간으로 태어난 민주주의가 제4차 산업혁명의 충격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면서 경제성장을 비롯한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요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오남용을 특정해 염려했다. 과표집된 소수의 의견이 온라인을 거쳐 부풀려지면서 기존의 정치 체계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송 교수는 “정치 지형이 양극화한 상황에서 SNS의 발달은 ‘팬덤 정치’을 극단화하고 공론장 분열을 심화하는 원인이 됐다”며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만 하더라도 오프라인 활동이 뒷받침되며 실체를 보였다는 점에서 지금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어 “SNS를 매개로 확산하는 ‘가짜 뉴스’는 상대 진영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있는데, 이를 막을 수 있는 뚜렷한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조기 대선에 앞서 개헌 논의를 본격화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까닭이다. 개헌이 한국 민주주의의 무너진 회복탄력성을 되찾을 방법이자 사회 통합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인용됐던 2016년과 달리 양당의 지지자들이 폭력 사태를 비롯한 극단적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유의했다. 내전을 촉발할 수 있는 유권자들의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수렴해 승화시켜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 현행 국정협의회가 정상화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당리당략을 떠나 국민선거를 통한 개헌을 먼저 하고 대선을 치러야 한다는 설명이다. 작은 쟁점 하나도 타협하지 못하는 국정협의회는 무용지물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송 교수는 “대선 전 개헌이 어려울 경우 다음 대선 입후보자들에게 어떤 방식의 개헌을 할 것인지 공약하게 해야 한다”며 “지금까지 나온 개헌안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방식만 결정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또한 정당 협치가 발동할 수 있도록 선거구를 조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거대 양당간 조정과 협상 역할을 할 수 있는 제3정당이 기반을 내릴 수 있도록 중선거구제로의 이행이 필수라는 것이다. 승자독식 방식의 소선거구제는 사표를 양산해 유권자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도 언급했다. 송 교수는 “선거구제 개혁과 별개로 각 정당의 혁신도 필수”라며 “특히 공천제도 개혁은 시급한 과제”라고 설명했다.

유권자들이 이념의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대북(對北) 정책과 소득분배 정책에서 이념간 대결이 치열하게 벌어지지만 정작 좌우파 정책이 미치는 성과 차이는 지극히 적다는 설명이다. 송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가 생환하려면 정당 내부 민주화가 필수적이고, 유권자 역시 좌우파 대리전 양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개헌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부작용을 줄이고 극단적 갈등을 최소화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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