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빌리어드뉴스 MK빌리어드뉴스 로고

[르포]“좀비는 줄고, 사람들이 돌아왔다”… 샌프란시스코 거리의 변화

무법지대였던 텐더로인·UN플라자 순찰과 단속 강화로 분위기 조금씩 변화 폭력·절도 줄고, 영화관·호텔 상권도 활기 관광객·부동산 회복세 “변화 실감한다”

  • 원호섭
  • 기사입력:2025.07.17 08:48:14
  • 최종수정:2025-07-17 09:41:33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무법지대였던 텐더로인·UN플라자
순찰과 단속 강화로 분위기 조금씩 변화
폭력·절도 줄고, 영화관·호텔 상권도 활기
관광객·부동산 회복세 “변화 실감한다”

“과거와 달라진 게 느껴집니다. 영화 속 장면처럼 느껴졌던 좀비들은 많이 사라졌어요.”

유니언 스퀘어에서 서쪽으로 불과 4~5블럭을 이동하면 샌프란시스코를 ‘워킹데드(미국의 유명 좀비 시리즈 드라마)’로 불리게 했던 텐더로인 지구를 찾을 수 있다. 텐더로인 지구에 가까워질수록 유니언 광장에서 느꼈던 활기는 사라지고 퀴퀴한 대마초 향과 오물 냄새가 코를 덮쳤다. 노숙자도 많아졌다. 다만 4~5블록의 도로를 한 시간 가까이 걷는 동안 마약에 취해 좀비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불과 1년 전 텐더로인 지역을 촬영한 유튜브 영상 등에서 볼 수 있는 무법천지의 거리보다 나아진 것이 느껴졌다.

마약 거리 텐더로인, 조금씩 회복 중
샌프란시스코 텐더로인 지구 거리에서 마약에 취한 듯 허리를 굽힌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 남성의 모습. 여전히 마약 중독자로 보이는 이들이 눈에 띄지만, 과거에 비해 그 수는 크게 줄어든 모습이다. [사진=원호섭 기자]
샌프란시스코 텐더로인 지구 거리에서 마약에 취한 듯 허리를 굽힌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 남성의 모습. 여전히 마약 중독자로 보이는 이들이 눈에 띄지만, 과거에 비해 그 수는 크게 줄어든 모습이다. [사진=원호섭 기자]

텐더로인 지구에서 25년을 살았다는 어마 브라운 씨는 “노숙자와 마약은 언제든 있었다. 다만 지금 볼 수 있듯이 길을 점령하고 있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찰이 수시로 이곳을 점검한다”라며 “차량 도난, 폭행과 같은 일은 많이 줄어든 것이 느껴진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은 올해 들어 1~2주에 한 번씩 텐더로인 지구 집중 단속에 나서면서 범죄율은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샌프란시스코 경찰국에 따르면 올해 1~5월 폭행, 살인과 같은 폭력범죄를 비롯해 절도와 같은 재산 범죄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각각 26%, 31% 감소했다. 다만 최근 마약 유통과 관련해 경찰 단속이 강력하게 이뤄지면서 오히려 과다복용에 따른 사망자가 늘어나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텐더로인 지구에서 3블럭 떨어진 곳에 지난 10일 애플 시네마가 개관했다. 영화관 주변 도로는 한산했지만 건물 1층 카페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이곳은 2021년 9월부터 2023년 2월까지 CGV 샌프란시스코점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팬데믹 여파와 노숙자, 치안 문제에 따른 관객수 감소 등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애플 시네마에서 일하고 있는 노아 씨는 “과거 CGV가 여러 문제를 이기지 못하고 철수한 것을 알고 있다”라며 “애플 시네마는 목요일 문을 열었는데 아직 찾는 사람도 많고 잘 운영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애플 시네마에서 다시 텐더로인 지구로 들어가 남쪽으로 3~4블럭만 걸으면 UN플라자가 나온다. 이곳 역시 팬데믹 이후 마약, 노숙, 도둑, 장물 거래 등이 벌어지면서 ‘무법지대’로 묘사됐던 곳이다. 평일과 주말 가릴 것 없이 수십 명이 모여 길거리에서 약을 팔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타당하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이날 UN 플라자 거리는 평화로웠다. 한 노숙자가 큰 소리를 지르며 공원을 활보하자 곧바로 공원 관리자(Park Ranger) 뺏지를 차고 있던 사람이 이를 제지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텐더로인 지구에서 노숙자를 위해 옷, 생필품을 나눠주는 모습 [사진=원호섭 기자]
텐더로인 지구에서 노숙자를 위해 옷, 생필품을 나눠주는 모습 [사진=원호섭 기자]

샌프란시스코 비영리기업으로 거리 청소, 순찰을 담당하는 얼번 알케미의 한 직원은 UN플라자 앞에서 기자와 만나 “우리는 과거보다 더 열심히 이 지역을 청소하고 있으며 노숙자 지원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라고 말했다. UN 플라자 옆에 있는 ‘프로퍼호텔’의 매니저도 “경찰들은 더 자주 이곳을 순찰하고 있다”라며 “이 근처의 치안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노력이 이어지면서 샌프란시스코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트레블에 따르면 올해 샌프란시스코를 찾는 관광객은 약 2330만~2390만명으로 전년 대비 소폭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관광객 예상 지출은 100억 달러로 지난해 대비 10% 가량 상승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미국의 온라인 부동산 정보업체 리얼터닷컴에 따르면 올해 5월 유니언 스퀘어와 텐더로인 일부 지역을 포함한 샌프란시스코 도심 지역의 주택 중간 가격은 지난해 대비 51%나 올랐다.

스티븐 황 샌프란시스코 부동산중개인협회장은 지난달 리얼터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샌프란시스코의 대표적 쇼핑 지구에서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늘어난 것을 느낄 수 있다”라며 “확실히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다니엘 루리의 신 실용주의 효과?
샌프란시스코 텐더로인 지구의 한 블록. 이곳에서 만난 한 주민은 “1년 전만 해도 이곳에는 노숙자 텐트가 가득했는데 지금은 많이 줄었다”라고 말했다. [사진=원호섭 기자]
샌프란시스코 텐더로인 지구의 한 블록. 이곳에서 만난 한 주민은 “1년 전만 해도 이곳에는 노숙자 텐트가 가득했는데 지금은 많이 줄었다”라고 말했다. [사진=원호섭 기자]

샌프란시스코 변화의 중심에는 올해 1월 취임한 다니엘 루리 샌프란시스코 시장의 정책이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리바이스 가문의 후계자이자 비영리 활동가 출신인 다니엘 루리는 1911년 이후 처음으로 선출된 정치 신인 시장으로 주목받았다. 진보 일색의 도시 정치에 중도적 실용주의를 내세우며 변화를 갈망하던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자선단체 ‘티핑 포인트’를 통해 노숙자 문제에 민간 자금을 유치한 경험을 강점으로 내세웠고, ‘관료주의를 넘어서겠다’는 메시지는 특히 중산층과 아시아 커뮤니티에 반향을 일으켰다. 취임 후 루리 시장 공공안전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 경찰 인력을 충원하고, 다운타운에 순찰 인력을 집중하여 배치했다.

노숙자 정책에서는 단순 보호소 확대보다 정신건강, 중독 치료 중심의 전략으로 전환했으며, 민간 기부 3750만 달러를 유치해 ‘기금’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주택난 해소를 위해 규제 완화, 허가 절차 간소화 등도 추진하고 있다. 뉴스위크는 이를 두고 “루리 시장은 민생 현장을 직접 찾고 중도 성향의 실용적 접근으로 시민 신뢰를 회복하고 있다”라며 “이제는 이념보다 실질적 결과가 중요한 시기로, 샌프란시스코는 변화의 시험대에 올랐다”라고 평가했다.

미국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지난해 대선 패배 후 민주당이 ‘신실용주의(New Pragmatism)’라는 기치 아래 재편하고 있고 루리 시장의 당선은 민주당 내 이념 전환의 결정적 장면이라고 묘사했다. 신실용주의란 범죄, 주거비, 공교육 등 시민의 일상에 직접 영향을 주는 삶의 질 문제에 집중하자는 전략이다. 폴리티코는 “샌프란시스코는 진보 정치의 상징에서 전국 민주당의 전략 재편을 이끄는 모델 도시로 떠오르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낭만의 도시는 왜 몰락했나
샌프란시스코 유니언 스퀘어. 한 샌프란시스코 주민은 “2019년에는 지금보다 사람이 두세배 많았다. 아직 부족하다”라며 “그래도 1년 전과 비교하면 나아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진=원호섭 기자]
샌프란시스코 유니언 스퀘어. 한 샌프란시스코 주민은 “2019년에는 지금보다 사람이 두세배 많았다. 아직 부족하다”라며 “그래도 1년 전과 비교하면 나아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진=원호섭 기자]

다양성과 자유, 인권을 핵심 가치로 삼았던 샌프란시스코는 팬데믹 이후 누적된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지며 심각한 도시 기능 마비를 겪었다. 노숙, 치안 악화, 마약 중독 문제와 함께, 인구 감소, 상권 붕괴까지 맞물리며 심각한 도시 붕괴 위기에 빠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민족이 모여드는 다문화 도시였다. 19세기 스페인과 멕시코를 거쳐 1846년 미국의 영토로 편입된 이후, 골드러시와 금문교 건설을 계기로 히스패닉, 흑인,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됐다. 차이나타운과 재팬타운이 형성됐고, 도산 안창호가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한 도시이기도 하다.

1960년대에는 히피 문화와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며 ‘자유의 도시’라는 별칭을 얻었다. 1977년에는 미국 최초로 성소수자 시의원이 탄생했고, 이를 기념해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는 ‘하비 밀크 터미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도시 전체 인구 중 성소수자의 비율이 18%에 달하는 등 미국 내 가장 포용적인 도시 중 하나로 손꼽혀왔다.

하지만 민주당이 수십 년간 시정을 독점하며 밀어붙인 진보적 정책은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사실상 ‘일당 도시’다. 시장은 1965년 이후, 입법권을 가진 감독위원회는 1975년 이후 민주당 소속으로만 구성됐다. 시 의회 없이 11명의 감독위원과 시장이 시정을 운영하는 구조 속에서 감시와 견제는 유명무실해졌고, 진보적 실험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2014년 시 정부는 마약 소지를 중범죄에서 경범죄로 낮췄고, 2019년 취임한 체사 보딘 지방검사는 마약 소지와 경범죄에 대한 기소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명분이었지만, 이에 따라 거리의 마약 사용과 노숙이 급증했다. 팬데믹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시민들은 결국 2022년 6월 주민소환제를 통해 보딘 검사장을 해임하기에 이르렀다. 950달러 이하 절도는 중죄에서 경범죄로 낮추는 법도 지난해 11월, 주민발의안이 통과되면서 재범인 경우 중죄로 처벌할 수 있게 됐다.

극단적 진보 정책은 민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도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유명 벤처캐피털 세쿼이아 마이클 모리츠 파트너는 뉴욕타임스에 “나 같은 민주당 당원도 샌프란시스코에 지쳤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내기도 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는 시 정부를 맘대로 주무를 줄 아는 작은 그룹의 민주당 동료들에 의해 불구가 됐다”라며 “공적 책임이 사라진 도시”라고 비판한 바 있다. [실리콘밸리 원호섭 특파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