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렇게 변질되면서 PC는 마국에서 설 자리를 서서히 잃었다. PC가 보호하고자 했던 사회적 약자조차 PC를 외면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8년 미국의 초당파 단체 '모어 인 코먼(More in Common)'이 8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80%가 PC에 반감을 드러냈다. PC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보호대상인 아시안, 히스패닉, 미국 원주민 그룹에서 더 높았다. 이러한 분위기의 반전은 트럼프가 2기 집권에 성공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어떤가? PC가 한국 사회를 지배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안전, 중소기업 및 영세상공인, 여성, 사회적 약자 보호 등 의제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이들이 기득권 카르텔로 탈바꿈해도 비판은 용납되지 않는다. 미국과 달리 PC에 대한 자성이나 재평가가 전혀 없다.
문제는 보수주의 정파도 PC 규범에 매몰돼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는 트럼프가 없다. 이해되는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유시장경제를 진일보시키기 위해서라도 포용적 사회는 우리 사회 공동의 지향점이 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실현시킬까 하는 점이다.
가치 그 자체보다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정책적 수단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이 '경제적 올바름(EC·Economic Correctness)'을 따져 보는 일이다. 그런데 EC는 아직 정립된 개념이 아니다.
미국 로욜라대학의 월터 블록 교수가 주류경제학이 오스트리아학파를 배척하는 현상을 '경제적 올바름'의 편견에 따른 것이라고 비판한 적은 있다. 실제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지만 오스트리아학파의 거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미국에서 경제학과 교수직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블록의 EC는 PC의 한 측면, 즉 대립되는 가치관을 철저히 배제하는 정치적 맥락만을 차용한 것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EC는 경제적 맥락에서 어떤 정책이나 대안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판단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립적 주의·주장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적 수단이 실질적으로 경제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올바름을 판단하자는 것이다.
이 개념은 따라서 진보적 가치도 배척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수단들이 그러한 사회를 실제로 만들 수 있는지를 검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투입 대비 산출의 극대화, 즉 정책의 생산성이 판단기준이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기준은 한국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높일 수 있는가다. 성장이 없으면 PC도 없다.
진보적 정책이건 보수적 정책이건 평가 잣대는 같아야 한다. 좋은규제시민포럼이 모든 국회입법발의안에 대해 규제영향분석을 실시하자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비용대비 혜택, 즉 생산성이 높은 법안이 경제적으로 올바른 법안이기 때문이다. 국책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는 일찍부터 경제적 올바름의 잣대를 들이댄 대표적인 예다. 이번 대선에서 주요 주자들이 명확히 할 것이 있다. PC와 EC 중 어느 것을 추구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분명한 점은 EC가 PC를 규율해야 한다는 점이다.
[강영철 좋은규제시민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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