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빌리어드뉴스 창간기획] 이상천 후 18년만의 우승…‘韓월드컵 개척자’ “자신있십니더, 내돈 내고라도 월드컵 나갈랍니다” 김정규 “마지막 샷 성공때 포효하던 경률이 모습 생생”
기사입력:2017.08.08 11:04:19
최종수정:2017.08.08 11:28:23
한국에 당구가 도입된 지 벌써 100년을 훌쩍 넘었다. 1909년 순종의 건강관리를 위해 당구테이블 2대가 공수된 것이 시초다. 그 동안 한국 당구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담배연기 자욱한 오락에서 이제는 전국민이 즐기는 스포츠로 거듭나고 있다. 감히 나라밖으로 나갈 엄두도 못 내던 ‘우물 안 개구리’ 시절도 벗어났다. 이제는 5명의 월드챔프를 보유한 세계적인 당구강국이 됐다. MK빌리어드뉴스가 108년 한국당구사의 획을 그은 결정적 경기를 모아 ‘한국당구 최고의 순간’시리즈로 조명한다.
2010 터키 안탈리아 3쿠션 월드컵에서 우승한 김경률이 활짝 웃으며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출처=대한당구연맹)
“결승전 때, 상당수의 관객들이 경률이(고 김경률 선수)를 응원하는 분위기였어요. 많은 분들이 한국의 첫 번째 월드컵 챔피언 도전이라는 것도 아시더라고요. 짜릿한 경험이었습니다.”
2010년 2월 21일, 세계 3쿠션 월드컵의 열기가 뜨겁던 터키 안탈리아가 한국에서 온 한 남자를 주목했다. 덥수룩한 헤어스타일에 당당한 표정, 뛰어난 경기력에 항상 방긋 웃는 얼굴로 ‘팬 몰이’ 하던 이 선수. 그는 바로 한국당구의 ‘영원한 개척자’ 고 김경률이다.
안탈리아 월드컵 결승전 시작을 앞둔 2010년 2월 21일 밤 11시(한국시간), 김경률은 상대를 노려봤다. 그리고 전의를 불태웠다. 그 상대는 다름 아닌 딕 야스퍼스.
김경률은 2년 전(2008년 9월), 수원월드컵 결승전을 떠올렸다. 좋은 컨디션으로 결승에 올랐지만, 마지막 고비를 못 넘기고 야스퍼스에게 생애 첫 월드컵 우승컵을 넘겨준 그였다. 풀세트(5세트) 접전 끝에 세트스코어 2:3으로 당한 패배라 김경률의 아쉬움은 더욱 컸다.
그리고 2년 후, 김경률은 야스퍼스에게 그날의 패배를 설욕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복수극의 무대도 월드컵 결승전으로 완벽했다. 안탈리아로 날아가기 전, 독일 전지훈련을 통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닦은 김경률은 8강에서 세계 1위 프레데릭 쿠드롱(벨기에), 4강에서 그해 최고의 컨디션을 보이던 마틴 혼(독일)까지 꺾는 등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김경률은 ‘2년전의 복수’, 야스퍼스는 ‘2008 수원월드컵 재현’을 노리는 가운데, 드디어 결승전의 막이 올랐다. 쾌조의 컨디션을 보이던 김경률은 첫 세트를 13:15로 내줬지만, 2세트(15:7) 3세트(15:11)를 내리 따내며 세트스코어 2:1로 앞서갔다.
웅성거리던 경기장은 경기가 진행될수록 고요해졌다. 두 선수의 플레이에 김장감이 고조된 탓이다. 이는 현장에서 김경률을 응원하던 한국당구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당구 국가대표팀 코치로 현장에 있던 김정규(김정규당구스쿨 원장)씨는 “손이 덜덜 떨리고, 손바닥이 흥건해질 정도로 땀도 많이 나 경률이가 샷 하는 사진을 찍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2010 터키 안탈리아 월드컵 시상식 후 딕 야스퍼스(맨 오른쪽) 등 입상자들과 함께 서 있는 김경률. (출처=대한당구연맹)
그런데 4세트가 시작될 무렵, 경기장에 예상치 못한 기류가 흘렀다. 관객들이 김경률의 플레이에 더욱 큰 박수를 보내기 시작한 것. 그의 공격이 성공하면 환호했고, 공이 빗나가면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김정규씨는 “경률이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보디랭귀지로 소통하는 등 항상 팬들과 함께 호흡하는 선수였다. 터키팬들이 경률이의 이런 면에 큰 매력을 느꼈다”면서 “여기에 ‘2002 한일월드컵’을 통해 맺어진 한국과 터키의 인연도 더해져 나중엔 경기장 분위기가 한국 홈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이에 더해 상당수의 터키인들이 2년 전 수원월드컵에서의 김경률과 야스퍼스의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 관객들은 눈앞에서 세계 4대천왕 구조가 깨지는 3쿠션계의 ‘지각변동’을 바랐다.
어깨에 큰 부담감을 안고 있던 김경률은 오히려 침착했다. 반면, 야스퍼스의 얼굴은 계속 굳어져갔다. 하지만 그의 저항도 대단했다. 심기일전한 야스퍼스는 4세트를 15:2로 가져갔다.
그렇게 맞이한 마지막 5세트. 이전까지의 세트보다 김경률의 큐는 더욱 날카로웠다. 14점을 쏘며 스코어 14:8로 크게 앞선 채 김경률은 마지막 샷을 준비했다. 흰색, 노란색, 빨간색 공이 그가 자신있어하는 뒤돌려치기 포지션에 섰다.
심호흡을 크게 한 김경률은 예상을 깨고, 앞돌려치기 샷을 시도했다. 이윽고, 수구가 제 1목적구를 맞은 다음 네 번의 쿠션 반동을 거쳐 제2목적구에 정확하게 도달했다. 평소 세리머니를 자제하던 김경률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포효했다. 큐를 두 손으로 번쩍 들고 소리치며 환호했다. 곁에서 지켜본 김정규 코치가 전한 우승순간이다.
시상식 후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경률. (출처=대한당구연맹)
고 이상천의 1992년 월드컵 투어 벨기에대회 우승 후 18년만의 한국인 제2호 월드챔프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게다가 이상천은 미국과 한국 2중국적이었지만, 김경률은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실력을 다져 세계 톱랭커가 된 선수다.
대한민국 당구계 경사의 순간, 김정규씨는 승전보를 문자로 한국당구 관계자들에게 전했다. 휴대전화를 든 그의 손은 덜덜 떨렸다. 관객석에서 마른 침을 계속 삼키던 김용철 DS코리아 대표(당시 대한당구연맹 전무이사)도 그제야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김용철 대표는 “피가 마르는 것 같은 5세트가 경률이의 승리로 끝나자,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고 기억했다.
김경률의 월드컵 제패는 한국 선수들에게 큰 자극을 줬다. 2000년대 후반,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던 시기의 한국당구는 이 일을 계기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는 한국당구계의 긍정적인 ‘나비효과’로 이어졌다. 최성원‧강동궁‧조재호‧허정한 최근엔 김행직까지, 한국의 3쿠션 월드컵 영광의 역사가 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많은 당구팬들은 이날 김경률의 우승이 그 발판이 됐음을 알고 있다.
2015년, 의문의 사고로 생을 달리하기 전까지 당구만을 생각하던 그였다. 자비로 월드컵에 출전한 일화는 유명하다.
2004년 당시 대한당구연맹은 처음으로 현재의 랭킹포인트제를 도입했다. 이 랭킹을 토대로 선발된 4명을 2005년도 월드컵에 출전시키며 항공료 등을 지원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김경률은 이듬해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해 3개 월드컵에 자비를 들여 나갔다. 그 무렵 김경률은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로 주변 당구인에게 “자신있십니더, 내 돈으로라도 나갈랍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구인들은 김경률을 ‘한국당구의 개척자’라고 부른다.
박태호 대한당구연맹 수석부회장은 “경률이는 2000년대 이후 10여 년간 3쿠션 ‘세계 톱랭커 12인’에서 밀려나지 않은 유일한 비유럽권 선수”라며 “천부적인 자질에 쉼 없이 연습하는 노력성까지 겸비한 한국당구 불세출의 인물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박태호 부회장은 “경률이의 2010 안탈리아 월드컵 우승 후 한국 3쿠션이 세계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면서 “그날의 우승은 한국 당구가 세계 강자들의 틈바구니로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교두보’ 역할을 한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2010 터키 안탈리아 3쿠션 월드컵에서 우승한 김경률이 활짝 웃으며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출처=대한당구연맹)
2010 터키 안탈리아 3쿠션 월드컵에서 우승한 김경률이 활짝 웃으며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출처=대한당구연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