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빌리어드뉴스 MK빌리어드뉴스 로고

“내년 한국서 당구월드컵 열겠다” 폭탄 선언

박태호 당구칼럼 ‘큐따라 바람따라’③통큰 회장 김영재
90년12월 도쿄월드컵 보러갔다가 ‘한국개최’ 선언
“한국서 개최하면 적극 돕겠다” 이상천 제안에 자신감
정부지원 없고 용품업체 후원도 무산…개인빚으로 충당

  • 기사입력:2018.04.15 08:00:03
  • 최종수정:2018.04.15 09:17:11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편집자주]MK빌리어드뉴스는 한국당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숱한 곡절과 앞으로의 숙제 등을 짚어보는 ‘박태호 당구칼럼-큐따라 바람따라’를 마련했다.

필자는 당구선수 출신으로 서울시당구연맹 회장과 대한당구연맹 전무이사를 거쳐 현재 대한당구연맹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각종 언론 칼럼을 통해 당구의 대중화에도 앞장서 왔다.

239278 기사의 0번째 이미지
사진설명1986년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진행된 프로당구 선수 선발전. (사진=큐스포츠)


1964년 보사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대한당구협회는 공인된 당구단체로 많은 역할을 해왔으며 한국당구 오늘이 있기까지 근간이 되는 조직체였다. 그러나 어느 시기부터 당구장을 경영하는 경영주 위주로 협회가 운영되다보니, 경기단체로서의 역할은 축소됐다. 이에 경기인들의 불만이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다수의 경기인들이 경기인 조직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몇몇 뜻있는 당구인들이 중심이 되어 ‘3구회’가 조직된다.

◆85년 김문장의 주도하에 대한당구회 창립

그러나 ‘3구회’는 주로 서울·경기권 위주 선수들로 구성되면서 전국적인 대표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대전 김’으로 유명한 역도선수 출신 김용석 선수와 한국 당구의 상징인 박병문 선수, 김명석 선수 등이 중심이 되어 실질적인 경기단체 조직에 들어갔다. 드디어 1980년 3구회 조직을 기반으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한국당구경기연맹’이 탄생한다.

초대 회장에 조동성을 추대하였고 그후 양귀문 등이 회장을 하면서 실질적인 한국당구 구심점이 되었다.

1983년 광산업을 운영하던 김문장은 하산을 하였고 당구인으로 재진입을 하기 위해 한국당구경기연맹에 가입신청을 냈으나 거절당한다. 이에 화가난 김문장은 선배 당구인들을 규합해 새로운 조직을 구상하는데, 바로 1985년 창립한 ‘대한당구회‘다.

초기 대한당구회는 예술구 및 사구와 3쿠션 등 활발한 사업을 펼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발전한다. 이를 토대로 이듬해 대한프로빌리어드협회란 타이틀로 전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프로당구’를 선언한다. 이어 선수선발전을 두 차례나 열면서 전국의 당구선수들 규합에 나섰다. 그러나 이상천 장성출 신재철 유재영 등 한국당구연맹 소속 유명 선수들이 불참하자, ‘대한빌리어드협회’의 초기 사업은 반쪽짜리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세는 ‘프로당구대회’를 추진하고 있는 ‘대한빌리어드협회’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대한프로빌리어드협회는 1986년 문화체육관에서 제1회 프로당구대회(우승 김무순)를 열었고, 이어 2회 (여의도백화점), 3회(뉴코아백화점), 4회(대전), 5회(르네상스호텔)대회를 잇따라 개최했다.

그러나 ‘대한프로빌리어드협회’의 프로당구대회는 르네상스호텔에서 열린 ‘제5회 프로당구대회’(우승 김정규)를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다시 한국 당구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1990년대 접어들며 한국 당구계에 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바람의 진원지는 1990년 출범한 ‘대한당구경기인협회(임의단체)’였다.

비록 임의 조직체였으나 대한당구경기인협회는 전국 14개 시도에 조직을 갖추고, 초대 회장에 김영재 씨를 추대했다.

239278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사진설명1985년 예술구경기에서 심사위원을 맡은 김영재 회장. (왼쪽 두 번쨰. 사진=큐스포츠)


◆ “한국에서 월드컵당구대회 개최하겠다” 도쿄 선언

김 회장은 90년 12월 열린 도쿄당구월드컵(우승 토브욘 브롬달, 준우승 루도 디엘리스, 3위 레이몬드 클루망, 4위 이상천)을 참관하러 갔다. 그때 이상천 선수에게서 “한국에서 월드컵대회를 유치하면 자신이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얘기를 듣는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도쿄월드컵당구대회 격려사 도중 “한국에서 월드컵당구대회를 열겠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당시 월드컵당구대회는 BWA(세계프로당구협회)가 주최하는 대회로, 연간 5~7차례 세계를 투어하면서 개최하는 당구계 최대 사업이었다. 더욱이 세계 랭커들에게 초청비를 지급한다는 항목이 포함됨으로써, 그 예산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한당구경기인협회는 임의단체여서 정부로부터 단 한푼도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이런 여건에서 월드컵당구대회를 여는 것은 엄청난 무리수였다. 결과적으로 김영재 회장은 월드컵대회 개최를 계기로 한 평생 불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서울월드컵당구대회’를 선언한 김 회장이 도쿄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무총장에 김문장을 선임하고 ‘월드컵대회조직위원회’를 구성한 거였다.

239278 기사의 2번째 이미지
사진설명1986년 열린 한 행사에서 소개받고 인사하는 김영재 회장. (사진=큐스포츠)


문제는 재원확보였다. 당시는 당구가 제도권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썩 곱지않은 시선을 받던 상태였다. 당연히 기업이 후원할 분위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월드컵당구대회 개최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는 쉽지않았다.

결국 손벌릴 데라곤 당구용품업체밖에 없었고 타이틀 협찬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김 회장이 찾아간 곳은 당구대 제조사이면서 어느 정도 자금력을 갖춘 유성캉가루 현두경 회장이었다.

두 사람은 어렵게 합의에 성공했다. ‘91 서울월드컵 공식당구대로 선정하고 대회때 당구대 6대를 설치하며 당구지는 유성모직으로 설치한다는 조건으로 협찬금 4000만원을 받기로 한 것.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선수금은 받았으나 잔여금은 받지못했다. 다급해진 김 회장은 대한당구협회에도 손을 벌렸으나, 별무성과였다.

결국 한국 최초로 91년 12월에 열린 서울월드컵당구대회(우승 레이몬드 클루망)는 부족한 재원을 김 회장 개인부채로 충당해야했고, 김 회장은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됐다.

서울 월드컵당구대회가 끝난 후 대한당구경기인협회는 김문장 씨의 사퇴로 공석이 된 임원들을 새로 구성했다.

김문장 씨는 현역에서 물러나 경기도 오산으로 내려갔다. 겉으로는 칩거로 보였지만 그는 그곳에서 한국당구를 위한 큰 그림을 그렸다.

239278 기사의 3번째 이미지
사진설명<박태호 대한당구연맹 수석부회장>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